1979년 일본 도쿄에 거주하는 ‘평범한 듯 보이는’ 네 자매가 있다. 첫째인 40대 츠나코(미야자와 리에)는 남편을 잃고 꽃꽂이 교실을 운영하고, 둘째인 마키코(오노 마치코)는 중학생 남매를 키우는 평범한 전업주부다. 셋째인 타키코(아오이 유우)는 도서관 사서로 근무하고, 넷째인 사키코(히로세 스즈)는 무명 복서인 남자친구와 동거하며 웨이트리스로 일한다.
어느 날, 타키코는 자매들을 한자리에 모아 나이 든 아버지 코타로(쿠니무라 준)가 애가 있는 서른 살 어린 내연녀를 만나고 있다는 폭탄 발언을 한다. 자매들은 흥신소 직원을 고용해 사건을 조사했다는 타키코의 말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화요일과 목요일만 출근하는 아버지가 언제 바람을 필 시간이 있는지, 누구와 바람을 피느냐면서 농담처럼 넘어간다.
구운 떡을 먹다가 앞니가 나간 츠나코는 웅얼거리고, 그것을 보며 마키코는 웃음보가 터지고, 관심 없다는 듯 사키코는 TV로 복싱 경기를 보고, 마키코의 남편은 장인을 옹호한다. 덕분에 그들이 앉은 테이블은 떠들썩하고 정신이 없다. 타키코가 흥신소에서 받은 사진이 쏟아지기 직전까지.
현실로 다가온 아버지의 외도에 자매들은 어머니 후지(마츠자카 케이코)가 알아채지 못하게 어떠한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드라마는 자매들이 아버지의 불륜을 종결시키는 행위 자체보다는, 해당 상황에서 비롯된 연쇄적인 사건이 포개지고 모두에게 적용되며 아수라장이 되는 현실이 더 중요한 듯 보인다.
● ‘바닷마을 다이어리’와의 연결
가장 친밀하고 쉬운 단어로 포섭된 한 집단이자 구성원인 가족. 속속들이 속사정을 알고 있으리라 믿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알지 못했던 빈틈이 발생하곤 한다. 한 집에 거주하지 않고 분가하거나 독립해서 부모의 품을 떠난 자녀들은 저마다의 특성으로 세포 분열된다. ‘이해’라는 보편적인 정서를 기반에 깔고 있지만, 곪아버린 가족 내부의 문제는 그것만으로 포용해 줄 수 없다.
영화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어느 가족’ 등에서 가족이란 이름을 해체해 현미경으로 들여다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아수라처럼’에서 뒤엉켜 아수라장이 된 가족, 그중에서도 자매에 집중한다. 2015년 ‘바닷마을 다이어리’에서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이 포함된 네 자매의 결집을 다뤘다면, ‘아수라처럼’에서는 피가 섞인 네 자매의 균열을 포착한다.
이번 작품은 1979년 NHK에서 방송한 동명의 드라마가 원작이다. 2003년 모리타 요시미츠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던 ‘아수라처럼’을감독은 46년 만에 리메이크했다. 원작 드라마를 집필한 여성 작가인 무코다 구니코가 바라본 당대 여성의 역할과 책임, 사회적 규제를 중심에 두면서도 가족과 자매, 여성의 의미를 다시 규정한다.
● 묘한 관계와 감정을 공유하는 네 자매들
사정도 형편도 지향점도 다른 네 자매는 ‘아버지의 불륜’으로 뭉쳤지만, 그다지 결속되는 느낌은 없다. 1868년 미국의 소설가 루이자 메이 올컷이 쓴 소설 ‘작은 아씨들’을 닮아있는 ‘아수라’ 속 네 자매들의 상황은 고요하지만 곧 집채만한 파도가 밀려올 기세다.
아이러니한 것은 첫째인 츠나코, 둘째인 마키코가 셋째인 타키코, 넷째인 사키코가 서로에게 방아쇠를 겨누고 있다는 점이다. 아버지를 비난하던 츠나코는 꽃꽂이를 수강하러 온 회원의 남편과 몰래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자신 역시 존재를 숨겨야 하는, 타키코가 가져온 사진 속의 그 여자와 같은 위치다.
마키코는 남편 타카오(모토키 마사히로)의 불륜 정황이 의심되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하고 있다. 출장을 간 남편이 누군가에게 했어야 할 전화를 자신에게 잘못했을 때에도, 회의라는 명목으로 집에 늦게 들어올 때에도, 아버지의 외도 사실을 은연중에 옹호할 때에도 마키코는 속으로 울음을 삼켜낸다.
자매라는 이름만 지워내면 서로를 비난하거나 받아야 하는 처지이지만 츠나코와 마키코는 티내지 않는다. 가끔씩 마키코가 외도를 하는 츠나코에게 자신의 감정을 투영해 끊어내라는 식의 조언이 오갈 뿐이다. 날카로운 칼날을 숨긴 채, 두 자매는 가장 친밀한 거리에서 알게 모르게 깊게 상처를 새긴다.
‘토니 타키타니’과 ‘종이 달’, ‘행복 목욕탕’의 미야자와 리에는 첫째 츠나코의 이중성을 그려낸다. 늘 기모노를 차려입고 기품이 넘치지만, 대책이라곤 찾아볼 수 없다. 동생의 권유에 재혼할 남자와 소개팅을 하지만 본능에 의해서 그 자리를 박차고 다시 내연남에게로 돌아오기도 한다. 언제 들킬지 몰라 두렵지만, 자석에 이끌듯 계속해서 사랑을 갈구하며 허기져있는 츠나코의 감정을 미야자와 리에는 안정된 연기력으로 섬세하게 묘사한다.
드라마 ‘마더’와 ‘최고의 이혼’의 오노 마치코는 ‘아수라처럼’의 둘째 마키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과는 영화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이후 재회했다. 오노 마치코는 두 남매를 키우는 평범한 엄마이자 가정주부지만, 내면에 해소되지 않은 응어리를 품고 있는 마키코의 슬픔을 적당한 무게와 깊이로 표현한다. 남편의 내연녀 이름을 알게 된 뒤 스트레스를 받아 슈퍼마켓에서 충동적으로 복숭아 통조림을 훔치다가 걸린 뒤에 이름만은 알려줄 수 없다며 빌던 간절한 얼굴과 가끔씩 남편을 노려보면서 뼈가 있는 말을 건넬 때의 강렬함도 빼놓을 수 없다.
남은 두 자매, 타키코와 사키코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바짝 올려 정갈하게 묶은 긴 머리에 치켜올린 안경, 원리와 원칙에 어긋나지 않은 샌님 같은 스타일의 타키코와 화려한 외모에 무명 복서인 남자친구인 남자친구를 성공시키겠다는 야망가인 사키코도 자꾸만 부딪힌다.
타키코는 늘 제멋대로인데다 예측 불가능한 사키코가 마음에 들지 않고, 반대로 사키코는 틀에 박혀있는 타키코가 고리타분하고 지루하다고 생각한다. 극단적으로 상반된 두 사람의 의견 차이는 결국 힐난하고 비난하는 단계로 나아간다. “우린 나이도 비슷하고 늘 한방을 썼는데”라는 말과 달리 각자만의 독립된 방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집안의 대소사에서도 타키코와 사키코는 자신들의 구역을 넘겨주지 않는다. 아버지의 뒷조사를 의뢰하다가 만난 사설탐정 카츠마타(마츠다 류헤이)와 타키코는 천천히 가까워져 결혼을 하게 되고, 예식 당일 동생 사키코는 신부보다 진한 색감의 옷차림에 유명 복서가 된 남편의 팬들까지 주렁주렁달고 방문해 긴장을 만든다.
아오이 유우는 셋째 타키코의 원리원칙주의자적인 면모, 직설적으로 토해내며 선을 긋는 모습을 입체적으로 그린다.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스파이의 아내’에서 보여줬던 가련하고 여리여리했던 얼굴이 아니라, 화장기 없는 모습과 단호한 태도로 전혀 다른 인상을 준다. 남자를 대하는 방법이 노련하지 않기에 서툴게 반응하는 타키코의 풋풋함을 아오이 유우는 한층 살려낸다.
‘세 번째 살인’과 ‘바닷마을 다이어리’ 이후 고레에다와 재회한 히로세 스즈는 막내인 사키코의 통통 튀고 새침떼기 같은 인상을 얄밉지만 사랑스럽게 그렸다. 타키코와 달리 남자를 노련하게 대하지만, 그렇다고 상처를 받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사키코는 야망 어린 눈빛 아래는 미련한 모습도 공존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은 비슷하지만 다른 가족 내부의 ‘자매’가 품고 있는 오묘한 감정을 7부작 드라마에서 유기적으로 연결한다. “자매란 참 이상하지. 질투가 이렇게 강할 수 있다니. 자매들이 불행해지면 역시 견디기 힘들어”라는 마키코의 대사는 여자 형제가 품고 있는 정서를 관통한다. 그들은 은근하게 깔려있는 질투와 시기를 지니고 서로의 상황과 처지를 대입해 보지만 결국 어려운 순간에 눈앞에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연출 : 고레에다 히로카즈 / 각색 : 고레에다 히로카즈 / 원작 : 1979년 방송된 드라마 ‘아수라처럼’ /출연: 미야자와 리에, 오노 마치코, 아오이 유우, 히로세 스즈 외 / 장르: 드라/ 공개일: 1월9일 /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회차: 7부작 / 플랫폼 : 넷플릭스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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