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로 판소리를 배우고 싶다는 연락이 오기도 하더라고요. 배우들이 멋지게 연기했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나온 것 같습니다. 제가 이날치에서 활동할 때는 저를 ‘이날치’라고 불렀다면, 이제는 ‘정년이’라고 부르더라고요. 하하!”
최근 종영한 tvN 드라마 ‘정년이'(극본 최효비·연출 정지인)에서 소리감독을 맡아 2021년부터 배우 김태리 등에게 소리를 지도한 권송희 감독이 드라마 종영 이후 주변의 반응에 대해 이같이 밝혔다. 1950년대 찬란한 전성기를 꽃피웠던 국극의 세계를 되살린 ‘정년이’는 최고의 국극 배우에 도전하는 윤정년(김태리)의 성장기와 함께 완성도 높은 국극 공연을 선보이며 시청자들을 극에 몰입하게 했다. 노래, 춤, 연기까지 완벽한 무대를 고집하는 여성 예인들의 모습을 통해 낯선 장르였던 국극이 새롭게 다가왔다. 한과 설움, 애절함 그리고 유쾌함까지 넘나드는 ‘우리의 소리’인 판소리에 대한 관심 역시 높아졌다.
주연인 김태리와 신예은을 비롯해 정은채, 김윤혜, 우다비, 오마이걸 승희 등 배우들은 ‘정년이’가 방영된 12회 동안 ‘춘향전’을 시작으로 ‘자명고’ ‘바보와 공주’ 그리고 ‘쌍탑전설’까지 4번의 무대를 극중극(드라마 속 삽입되는 작품)의 형식으로 선보였다. 이 과정에서 수준 높은 소리 실력을 뽐냈는데 배역에 따라 보통 1년에서 길게는 3년의 연마의 기간을 거쳐 대역이 아닌 자신들의 목소리로 열창했다. 이를 진두지휘한 인물이 바로 권송희 소리감독이다.
물론 배우가 연습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부분은 사운드 시스템을 활용한 후반작업을 거치기도 했지만, 극 속에서 나온 판소리는 배우들의 실제 목소리를 기반으로 했다. 한양대 국악과를 졸업하고, 서울대 음악과 박사과정을 수료한 권송희 감독은 지난 2020년부터 2023년까지 ‘범 내려온다’로 유명한 밴드 이날치의 보컬로 활약했다. 올해는 신예 국악인들의 등용문인 ’21세기 한국음악 프로젝트’ 음악감독으로도 나서는 등 현재 국악계를 이끌어가고 있는 인재 중 한 명이다.
‘정년이’의 소리감독으로 배우들을 연습시키고, 이들을 진짜 소리꾼 뺨치는 실력으로 이끈 권송희 감독을 서면으로 만나 드라마에 얽힌 다양한 뒷이야기를 들었다.
‘정년이’의 첫 방송 당시를 떠올린 권 감독은 “3년의 과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수많은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치열하게 고민했던 시간들이 헛되지 않은 것 같아 감격스러웠다”고 돌이켰다. ‘정년이’를 시작할 때까지만 해도 “여성 중심의 서사에 판소리가 중심인 드라마가 과연 잘 만들어질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두렵기도 했지만 “시청자들의 반응이 좋아서 한 회 한 회 올림픽 경기를 보듯이 봤고, 종영까지 잘 마무리된 것 같다”고 말했다.
● 권송희 감독이 본 김태리는? “소리꾼의 마인드”
권송희 감독은 정년이 역할을 맡은 김태리가 극 속에서 ‘타고난 소리 천재’가 될 수 있도록 무려 3년간 훈련을 이끌었다. 권 감독은 김태리에 대해 “몸에 아이언맨 아크로 원자로가 심어 있는 줄 알았다”며 “열정, 성실, 집요함 그 자체였다”고 높게 평가했다.
“본격적인 연습을 하기 전 태리씨가 다른 배우들과 함께 ‘산공부’를 하고 싶다고 해 남원에 2박 3일간 다녀왔어요. 광한루도 직접 가서 (‘춘향전’ 등장인물인)방자와 이도령의 정기도 받았죠. 정말 소리꾼의 마인드였습니다. 배운 곡 중 자신 있는 것을 골라 작은 발표회도 두 차례 했는데, 그때마다 실력이 일취월장했죠.”
판소리는 단시간에 습득하기 어려움이 있는 장르였다. 그렇지만 김태리가 “2년이 지난 이후에는 소리의 음정과 테크닉을 습득하는 시간이 짧아졌다”면서 극 중에서 선보일 소리가 정해진 뒤에는 “집중하고 반복하면서 소리가 조금 편해지니 디테일을 표현할 여유까지 보였다. 점점 ‘정년이’ 그 자체가 됐다”고 감격했다.
난관에 부딪히기도 했다. 김태리 외 대부분의 배우들은 1년이라는 시간 안에 극중 매란국극단 단원처럼 보이도록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짧은 시간 안에 자연스럽게 소리를 해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촉박했다”던 권 감독은 “효율적으로 각 역할의 매력이 두드러지게 보일 수 있도록 소리를 표현하는 방법을 고민했다”고 고백했다. 권 감독 외에도 세 명의 명창이 각각 메인 배우들을 담당했고, 현장에 번갈아 가며 배우들의 발음과 발성을 교정하고 점검했다.
권 감독은 기억에 남는 배우로 정년의 라이벌인 허영서를 연기한 신예은을 떠올렸다. 신예은을 “무소의 뿔처럼 전진했다”고 표현한 권 감독은 “‘정년이’의 극중극에 모두 출연하고 소리도 많이 한 사람은 영서였을 것”이라며 “처음에는 소리가 어려워 힘들어했지만 묵묵이 연구하고 흔들려도, 잘 되어도 단단하게 자신의 길을 갔다. ‘춘향전’에서 이도령 연기를 현장에서 보는 순간 정말 깜짝 놀랐다”고 이야기했다.
‘정년이’에는 1회 정년이가 시장에서 부르는 ‘남원산성’을 비롯해 ‘군사설움’ ‘갈까부다’ ‘생사는 천륜이라’ ‘추월만정’ ‘사랑가’ 등 수많은 판소리가 등장했다. 권 감독은 준비하기 가장 어려웠던 판소리로 정년이가 여성 국극단 합동 공연인 ‘바보와 공주’ 아역 오디션에 참가했다가 무리한 훈련으로 무대 위에서 각혈을 한 ‘생사는 천륜이라’를 꼽았다. 이 노래를 부르다 정년은 지극히 탁한 목소리로 고음을 내지 못하는 일명 ‘떡목’이 됐다.
“태리씨와 가장 고민이 많았던 장면이었습니다. 극중 정년이가 ‘떡목’이 되어야 하는 소리이기 때문에 고음이 중심이 되는 소리를 준비했어요. 계속 들으면 시청자 입장에서 불편할 수도 있다는 걱정과 염려도 있었어요. 진짜 떡목으로 나오기 위해 태리씨와 오랫동안 높은 고음을 지르면서 목을 쉬게 하기도 하고, 그 감정에 이입할 수 있게 여러 방법을 찾으려고 했습니다. 결과적으로 훌륭하게 해결된 것 같아 가장 애정이 가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이날치에서는 판소리와 현대적인 팝을 ‘힙’하게 조화시켰고, ‘정년이’에서는 국극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가르쳤다. 이렇듯 권 감독은 ‘우리의 소리’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나이가 들고 삶의 폭이 넓어지면서 판소리의 사설에 담긴 인물의 입장을 여러 각도로 이해하기 시작했다”던 그는 “한 사람이 고수(판소리 연주 때 북을 사용하여 소리의 반주를 맡은 사람)와 함께 모든 인간사를 표현하는 이 장르가 이렇게 깊고, 아름답다는 걸 요즘 들어 다시 느끼고 있다”며 판소리의 매력을 짚었다.
무엇보다 권 감독은 “‘정년이’를 통해 독창적이고 다양한 콘텐츠가 만들어질 수 있는 희망에 일조한 것 같아 기쁘다”면서 “우리의 소리, 국극의 매력을 많은 분들께 알리게 된 것 같아 소리꾼으로서 감사하다”는 인사를 전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서는 “내년에는 전통 소리에 집중하는 한 해를 보낼 것 같고, 미뤄뒀던 개인 창작 작업과 관련된 활동을 할 것 같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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