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의 상흔이 여전한 1950년대 중반, 국극의 세계에 흠뻑 빠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는 그 시작부터 ‘모험’이나 다름없었다. 영화에서 간간이 다룬 판소리에서도 한 걸음 더 나아간 국극이라는 생경한 장르를 전면에 내세운 데다, ‘드라마의 필수템’으로 통하는 남녀의 로맨스를 철저하게 배제해 여성들만의 서사에 집중했다. 이전에 본 적 없는 작품이다. 원작인 웹툰이 아무리 많은 팬을 거느렸다고 해도, 흥행 보증수표로 꼽히는 배우 김태리가 타이틀롤을 맡았다고 해도, 장르와 소재를 넘어 모든 것이 도전 그 자체인 ‘정년이’의 성공을 보장할 순 없었다.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가운데 출발한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극본 최효비·연출 정지인)가 지난 17일 막을 내렸다. 동명의 원작이 100화가 넘는 방대한 내용으로 구성된 반면 이를 압축한 드라마는 회당 60여분 분량의 12부작으로 이뤄졌다. 주인공 김태리의 말처럼 “100화가 넘는 원작을 12부작 안에 담는 건 모두에게 큰 도전이었고 그렇게 함축된 서사 안에서 매번 다음 장면을 납득시킬 수 있는 징검다리를 그려내야만 하는” 혹독한 과정을 거쳐야 했다.
모든 이야기가 공개된 지금, ‘정년이’에 대한 평가는 시청자 개개인의 몫이지만 첫 회에서 4.8%(닐슨코리아·전국 기준)로 출발한 시청률이 마지막 회에서 16.5%까지 치솟았다는 사실에서 작품의 인기는 감지된다. 드라마가 지핀 열기는 새로운 분야로도 옮겨 붙고 있다. 지금은 사라지다시피한 국극도 다시 주목받고 있다. ‘정년이’에 등장한 ‘자명고’와 ‘바보와 온달’ 등 국극을 진짜 무대에서 다시 감상하고 싶다는 의견도 이어진다.
● 김태리부터 문소리까지 배우들의 열창
‘정년이’는 목포 바닷가에서 언니와 생선을 팔던 윤정년(김태리)이 당대 최고로 꼽히는 매란국극단에 입성해 배우로 성장하는 과정을 그린 작품이다. 시골 난전에서 노래하던 정년이의 재능을 단번에 알아본 건 국극 배우 문옥경(정은채). 국극을 처음 본 순간 가슴이 요동치는 것을 느끼면서 “별천지를 봤다”고 말하는 정년이는 엄마의 극심한 반대를 물리치고 야반도주해 목포를 떠나 어렵게 국극단에 들어간다. 그때부터 고난의 연속이다. 주변의 질투와 공격을 견디면서, 한편으론 빨리 인정받고 싶은 내적인 갈등을 겪으면서 정년이는 성장한다. 드라마는 오직 정년이의 성장사에만 집중했다. 원작 웹툰이 다양한 인물들을 대거 배치해 1950년대 시대상과 국극의 세계를 방대하게 그린 것과 달리 드라마는 정년이가 겪는 사건과 감정에 몰입해 빠른 속도로 12부작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때문에 드라마는 이야기를 확장하는 과정은 물론 캐릭터를 보여주면서 군데군데 빈틈을 노출한다. 가령 정년이가 국극을 익히면서 겪는 성장통의 과정이 시청자의 반감을 살 만큼 극단적으로 과장되거나, 극의 동력인 핵심 캐릭터 허영서(신예은)의 변화를 보여주는 대목들이 줄곧 생략된 점, 자신의 위치에 갈증을 느끼는 문옥경과 그의 파트너 서혜랑(김윤혜)의 관계가 평면적으로 그려져 아쉬움을 남긴다. 다만 인물의 변화나 각각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감정의 파도를 일일이 설명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보는 시선에 따라 다양한 방향에서 해석하는 여지를 남겼다고도 볼 수 있다.
‘정년이’의 진짜 가치는 배우들의 눈부신 도전이 작품의 완성도를 어디까지 올리는지 직접 보여줬다는 데 있다. 원작의 팬이자, 웹툰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과정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김태리의 활약뿐만이 아니다. 이전까지 판소리는 물론 국극과 접점이 없었던 신예은과 우다비, 승희 등 신예부터 정은채와 김윤혜는 물론 베테랑 배우 라미란과 문소리가 한마음으로 소리 훈련을 거듭하고 국극의 세계를 체득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끌어올렸다.
3년간 소리 연습에 몰두하면서 주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판소리를 선보였다는 김태리는 극중 정년이의 성장 과정에서 소화한 국극 ‘춘향전’의 개구진 방자, ‘자명고’의 힘찬 군졸, ‘바보와 공주’ 속 울부 짓는 청년 온달 그리고 대망의 ‘쌍탑의 전설’에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한 맺힌 피를 토하는 아사달의 마음을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드라마틱한 표현과 감정을 담은 소리로 표출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아 좌절한 딸 정년이의 곁에서 한때 천재 소리꾼으로 인정받은 엄마 용례(문소리)가 들려주는 ‘추월만정’의 열창 역시 단연 압권이다. 문소리는 ‘추월만정’을 부르는 단 한 장면을 위해 1년간 1000번 넘는 반복 훈련을 거듭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모든 배우들은 길게는 3년, 짧게는 1년 동안 쉼없이 소리 연습을 거듭해 드라마에 나오는 모든 장면을 직접 소화했다. 여기에 제작진은 배우들의 소리가 더욱 풍성하게 표현되도록 후반 작업 과정에서 보이스 기술을 가미해 완성도를 높였다.
무엇보다 젊은 세대의 팬층을 거느린 ‘핫한’ 배우들이 선사하는 판소리의 세계는 시청자의 눈과 귀를 사로잡았다. 1993년 개봉한 임권택 감독의 ‘서편제’를 지금껏 판소리 영화의 대명사로 기억하는 시청자에게, 그로부터 간간이 이어진 류승룡과 수지의 ‘도리화가’, 조정래 감독의 ‘소리꾼’ 등으로 명맥을 유지한 우리 소리의 이야기가 이른바 MZ세대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힙한’ 장르로 주목받도록 기여했다는 점에서 ‘정년이’는 의미를 지닌다.
● ‘퀴어 코드’ 풀어낸 영리한 선택
‘정년이’가 드라마로 출발하면서 원작 팬덤 사이에서 제기된 ‘퀴어 코드 배제’에 관한 지적은 정작 방송을 시작한 이후에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글로벌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플랫폼의 콘텐츠가 아닌, 총 제작비 300억원대를 쏟아부어 TV 채널 드라마에서 원작의 퀴어 코드를 적극 차용하기에는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제작진은 원작에서 정년이를 돕는 주요 캐릭터인 권부용을 없애는 등 각색의 과정을 거쳤고, 이 같은 사실이 방송 전 알려지면서 일부 원작 팬덤의 반감을 사기도 했다.
그렇다고 전부 포기한 건 아니다. 원작과 차이를 둔 ‘정년이’는 윤정년이 국극을 통해 성장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다양한 캐릭터를 통해 여성의 연대, 그리고 우정을 넘어서는 특별한 감정을 아울러 담았다. 당대 국극의 인기를 주도한 남역 스타 문옥경이 풍기는 중성적인 매력, 그를 사랑하는 서혜랑의 마음, 그리고 정년이와 주란이 사이에 형성된 애틋한 교감을 통해 원작과 크게 다르지 않은 감정들을 녹여냈다. 제작진의 ‘영리한’ 선택이기도 하다.
‘정년이’는 오래도록 기억될 이름이다. 최근 몇 년간 방송가의 트렌드를 좌우한 장르물과 로맨스 사극 등의 흐름에서 ‘소리’와 ‘국극’을 내세운 1950년대 시대극에 도전한 당당한 모험으로 성과를 거뒀다.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시대에 눈을 돌려 낯선 소재, 생소한 캐릭터들을 내세워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타이틀롤 김태리뿐 아니라 특별출연 형식으로 동참했지만 매번 등장할 때마다 시청자의 눈물샘을 터트린 문소리까지, 각자의 인물에 흠뻑 빠진 배우들의 진가가 일군 성취다.
감독 : 정지인 / 극본 : 최효비 / 출연: 김태리, 신예은, 라미란, 정은채, 김윤혜, 우다비 외 / 장르: 드라마, 시대극 / 공개일: 10월12일 / 관람등급: 15세 이상 관람가 / 회차: 12부작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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