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계속 공연을 할 거여. 우리가 발붙이고 서는 것이 다 무대가 될 것인디 뭣이 더 필요허냐.”
배우 김태리가 읊는 정년이의 마지막 대사가 짙은 여운을 남기고 있다. 김태리로 시작해 김태리로 막을 내린 tvN 토일드라마 ‘정년이'(극본 최효비·연출 정지인)가 꿈을 향해 도전을 멈추지 않는 이들의 뜨거운 무대로 이야기를 마무리했다. 정년이를 중심으로 뭉친 매란국극단의 에너지가 폭발한 마지막 회는 예상대로 최고 시청률을 달성했다. 17일 방송한 최종회의 시청률은 16.5%(닐슨코리아·전국 기준). 지난 10월12일 첫 방송에서 4.8%로 출발해 기록 상승을 거듭한 끝에 거둔 뜻깊은 성과다.
‘정년이’는 타이틀롤 윤정년으로 맹활약한 김태리 덕분에 시작된 드라마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2019년 연재를 시작한 원작 웹툰의 팬이기도 했던 김태리는 원작자인 서이레, 나몬 작가가 주인공 윤정년을 상상하면서 김태리의 첫 영화 주연작인 ‘아가씨’의 숙희 캐릭터를 참고했다는 사실을 알고 더 큰 관심과 호기심을 가졌다고 밝혔다. 이후 웹툰이 드라마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김태리가 작품에 품은 관심은 결정적인 기폭제가 됐다. 김태리의 소속사 역시 ‘정년이’의 공동 제작사로 참여했다. 배우의 소속사가 드라마의 공동 제작으로 참여하는 경우는 흔하지만, 이번 ‘정년이’는 조금 다르다. 원작 판권의 구매부터 드라마 기획과 대본 집필 과정 등 제작 전반에 참여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정년이를 연기해 웹툰의 캐릭터가 아닌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만들려고 결심한 김태리는 대본이 전부 완성되기 전인 2021년부터 소리 연습에 돌입했다. 이후 소리 훈련에 몰두한 기간만 3년에 이른다. 2022년 영화 ‘외계+인’ 시리즈를 개봉할 때도, 지난해 7월 방송한 SBS 드라마 ‘악귀’ 촬영을 끝내고도 오직 소리 연습에 집중했다.
이로 인해 한동안 연예계 안팎에서는 ‘김태리가 소리에 푹 빠졌다’는 말들이 흘러나왔다. ‘정년이’ 촬영을 준비하는 하나의 과정으로 여겨졌지만, 그의 소리를 직접 들은 동료 배우들의 반응은 달랐다. 놀라워했고, 일부는 김태리의 권유로 함께 소리를 배우기도 했다. 실제로 김태리는 “가족은 물론 제 주변 분들 중에 제가 소리를 하는 걸 안 들어본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여기저기서 불렀다”고도 말했다.
작품과 역할에 배우가 얼마나 진심으로 임하는지, 숙련된 기술을 연마하기 위해 혹독한 훈련조차 ‘즐기는’ 배우만이 보여줄 수 있는 깊이를 김태리는 ‘정년이’를 통해 아낌없이 쏟아냈다. 드라마 초반 ‘천재 소리꾼’의 등장을 알리는 목포 난전에서의 판소리부터 우여곡절 끝에 국극단에 입단해 ‘나만의 방자’를 찾아 화려하게 데뷔한 ‘춘향전’을 거쳐, 열망이 앞선 탓에 전체를 보지 못하고 무대를 짚어삼킨 ‘자명고’의 무대, 그리고 피를 토한 ‘바보와 공주’ 오디션 장면까지 오직 김태리만 가능한 애끓는 소리와 드라마틱한 연기의 향연으로 시청자의 오감을 사로잡았다. 뜨거운 반응 가운데 김태리는 ‘소리를 듣는데 왜 눈물이 흐르는지 모르겠다’는 시청자의 반응이 가장 마음에 와 닿았다고 했다.
마지막 회를 장식한 국극 ‘쌍탑의 전설’ 무대 역시 압권이다. 위기에 빠진 국극단이 마지막 희망을 걸고 올린 무대에서 정년이는 누구도 넘볼 수 없는 절절한 소리와 연기를 펼쳐 보였다. 제작진은 정년이 그 자체가 된 김태리의 모습으로, 그가 소화하는 국극의 무대로, 드라마의 엔딩 20여분을 꽉 채웠다. 뜨거운 무대가 끝난 뒤 객석을 채운 관객들이 모두 일어나 감격의 눈물 속에 박수를 보낸 것처럼, 시청자들도 모든 걸 쏟아낸 김태리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극중 목포 소녀 정년이가 국극을 처음 보고 “내게는 별천지 같았다”고 말한 대사처럼, 김태리가 온 몸으로 표현한 국극의 세계는 시청자에게도 ‘흥미로운 별천지’ 그 자체였다.
● 더 기대되는 ‘김태리가 만들 별천지’
대학을 졸업하고 연극 무대에 주로 오르던 김태리는 2016년 박찬욱 감독의 연출작 ‘아가씨’의 주연을 맡아 ‘혜성처럼’ 등장했다. 이후 햇수로 9년 동안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면서 대중과 깊게 소통해왔다. 고된 일상에 지쳐 도시의 삶을 뒤로하고 엄마의 시골집에 정착해 스스로 위안을 찾아가는 ‘리틀 포레스트’의 혜원, 혼란스러운 조선 후기 외세에 맞서 자주적인 독립을 꿈꾸는 의병의 이야기인 ‘미스터 션샤인’의 고애신, 우주의 세계를 유영하는 ‘승리호’의 장선장과 시공간을 초월한 판타지의 세계로 관객을 안내한 ‘외계인’ 시리즈의 이안은 분명 각기 다른 인물들이지만 시청자가 김태리를 통해 탄생한 ‘처음 만나는 캐릭터’였다.
노력형 펜싱 천재 나희도의 성장기를 그린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악령에 잠식당하면서도 굳건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는 ‘악귀’의 구산영을 통해서도 김태리는 장르나 소재와 무관하게 어떤 역할을 맡아도 매번 다른 얼굴로 ‘김태리만의 작품’을 만드는 재능을 증명했다. 그렇게 응축된 힘은 이번 ‘정년이’를 통해 폭발했다. 소리를 배우고, 국극의 연기를 체화하는 과정은 시작일 뿐이다. 정년이라는 인물을 어떻게 만들어 시청자와 소통하고 교감할지 끝없는 고민했다.
김태리는 ‘정년이’를 마치고 소속사를 통해 밝힌 소감에서 “쏟아낼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냈다고 자부하더라도 마음 한켠에 무언가 조금 더 해볼 수 있는 것이 있었을까 아쉬움을 느낀다”며 “100화가 넘는 원작 웹툰을 드라마 12부작 안에 녹이는 작업은 모두에게 도전이었고 그렇게 함축된 서사에서 매번 다음 장면을 납득시킬 수 있는 징검다리를 그려내야만 했다”고 돌이켰다. 그렇게 지금의 ‘정년이’가 탄생했다는 설명이다.
모든 촬영을 마치고 드라마가 방송을 시작하면서 완성된 작품을 돌아보는 김태리에게는 또 다른 고민이 시작됐다. “드라마 방송 중에 그런 모든 논리를 뛰어넘어 ‘그럼에도 주인공으로 사랑스러움을 지키는 방향의 연기를 했어야 했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했다”는 그는 “구체적인 답은 찾지 못했지만 그저 ‘나는 이런 선택을 했고 그런 가능성도 있었구나’ 답이 없어도 충분히 성장이라고 생각한다”고도 짚었다.
마지막 회에서 김태리가 읊은 마지막 내레이션은 정년이의 마음인 동시에 김태리가 이 작품에 임한 각오로도 읽힌다. 발붙이고 서는 어디든 전부 무대가 된다는 정년이의 다짐은, 드라마 ‘정년이’를 넘어 또 다른 작품으로 이어지는 ‘김태리만의 별천지’에 기대와 설렘을 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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