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신인 감독들의 ‘눈부신’ 약진
극장으로 향하는 관객들의 발걸음이 줄어들며 누군가는 한국영화의 위기를 말한다. 그렇지만 작지만 반짝이는 영화들이 신예 감독들의 손에 의해 탄생하면서 빛나는 앞날을 기대케 한다.
최근 데뷔작을 내놓은 신인 감독들은 익숙하게 봐왔던 상업영화의 문법을 깨뜨리거나 지독한 현실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관객들에게 새로운 감상을 안기는 실험적이지만, 의미 있는 시도로 눈길을 사로잡는다.
● 일상의 소재 안에 풀어낸 독특한 시선
지난 5월31일 개봉한 가성문 감독의 ‘드림팰리스’, 7월26일 개봉한 이솔희 감독의 ‘비닐하우스’, 9월6일 개봉한 유재선 감독의 ‘잠’, 10월11일 개봉한 김창훈 감독의 ‘화란’은 이들의 첫 장편영화 데뷔작이자 올해 개봉한 영화 중 작품성과 화제성을 동시에 잡은 작품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특히 ‘잠’은 손익분기점인 80만명을 넘어서 147만명의 선택을 받았다.
이들 신인 감독들의 장편 데뷔작은 일상의 소재를 차용하면서도 독창적인 시선을 견지하고 익숙한 듯 느껴지는 소재를 새롭게 풀어내 주목받았다. 젊은 감각도 엿보였다.
‘드림팰리스’가 부동산, 산업재해, 산재보상 등 동시대의 사회 이슈를 관통하며 약자끼리 싸우는 현실을 보여줬다면 ‘비닐하우스’는 고령화 시대, 돌봄이 필요한 자와 돌보는 자의 비극을 현실적으로 그리며 서스펜스를 안겼다.
‘잠’은 불면증 혹은 수면 중 이상행동이라는 일상적 소재를 장르적 재미로 버무리며 봉준호 감독으로부터 “최근 10년간 본 영화 중 가장 유니크한 공포”라는 평가를 얻었다.
‘화란’ 역시 일면 익숙하게 봐 왔던 누아르 장르에서 벗어나 서로를 닮은 두 주인공의 비극적인 운명을 날것 그대로의 연출로 풀어냈다. 폭력에 노출된 소년의 이야기를 통해 비정한 세상의 단면을 비췄고, 그 역할을 맡은 배우 송중기와 신예 홍사빈 역시 돋보였다.
● ‘너와 나’→’괴인’→’만분의 일초’
‘드림팰리스’와 ‘비닐하우스’ ‘화란’ 등이 신인감독들의 영화이지만 무게감을 갖춘 배우들이 주연을 맡아 작품을 이끌었다면 최근 개봉해 상영 중인 신예들의 작품은 보다 실험적이고 과감하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2021년)에서 가혹 행위에 시달리다 탈영한 조석봉 일병 역으로 눈도장을 찍은 조현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너와 나'(제작 필름영)는 10월25일 개봉해 현재 관객과 만나고 있다. 조현철은 배우로 먼저 얼굴을 알렸지만, 한국예술종합학교 재학 당시 연출을 전공하면서 다양한 소재의 단편영화를 선보인 바 있다.
‘너와 나’는 수학여행 하루 전날 서로에게 전하고 싶은 말을 마음속에 담은 채 꿈결 같은 하루를 보내는 고등학생 세미(박혜수)와 하은(김시은)의 이야기다. 풋풋한 소녀의 사랑과 동시에 죽음을 담으며 짙은 여운을 남겼고, 관객들의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개봉 8일째 누적 관객 수 1만명을 넘었다.
11월8일 개봉한 ‘괴인'(제작 영화 제작위원회)은 단편영화 ‘해운대 소녀'(2012년) ‘반달곰'(2013년) 등을 선보인 이정홍 감독의 작품. ‘올해의 문제작’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만큼 독창적인 서사와 독특한 캐릭터로 무장했다.
감독의 실험 정신은 영화제에서 잇따라 거둔 수상 성과로도 인정받았다. 지난해 열린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뉴 커런츠상 등 4개 부문을 석권했고, 제48회 서울독립영화제 대상, 제11회 무주산골영화제 감독상과 영화평론가상을 휩쓸었다.
‘괴인’은 주인공인 기홍(박기홍)이 친구, 고객, 집주인, 가족 등 다양한 이들과 관계를 맺는 일상을 따라가며 한 인물의 입체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평범한 남자인 기홍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인간관계와 이로 인한 연쇄적인 사건은 전형적이지 않지만, 작품에 몰입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한다. 개봉 첫날 1626명을 동원하며 박스오피스 9위로 출발했다.
11월15일 개봉하는 김성환 감독의 ‘만분의 일초'(제작 한국영화아카데미) 역시 눈여겨봐야 할 작품이다. 한국영화에서는 처음 검도의 세계를 본격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영화는 대한민국 검도 국가대표 최종 선발 라인업에 오른 김재우(주종혁)가 그의 삶을 송두리째 뒤흔든 황태수(문진승)와 대결하며 생기는 내용이다. 선수들의 기합 소리, 죽도 소리, 서로를 탐색하다가 빈틈이 보이며 재빠르게 공격하는 몸놀림은 물론 경기가 끝난 뒤 묵상을 하면서 내뱉는 호흡 등을 통해 검도만이 가능한 매력을 보여준다.
과거의 트라우마를 붙잡은 채 한쪽 손에 힘을 꽉 쥐고 살아가는 주인공이 힘을 빼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하며 주제의식까지 올곧게 전달한다.
신인감독들의 도약과 약진은 한국영화의 다양성 확보에도 긍정적인 시그널을 만들고 있다. 올해 여름 극장가에서 묵직한 주제 의식을 전하면서도 흥행에도 성공한 ‘콘크리트 유토피아’의 엄태화 감독 역시 장편 데뷔작 ‘가려진 시간’으로 주목받은 신인이었고, 실력을 인정받은 끝에 여름 시장을 겨냥한 블록버스터의 연출자로도 역량을 키웠다.
신인의 도약은 지난해 하반기 영화계의 이슈이기도 했다.
지난해 11월 개봉한 영화 ‘올빼미’를 연출한 안태진 감독은 2005년 영화 ‘왕의 남자’의 조연출을 맡은지 꼭 17년 만에 장편 데뷔작을 선보여 흥행을 이뤘다.
그는 당시 51세의 신인감독으로 ‘늦깎이’ 데뷔를 했지만, 오랜 기간 영화계에서 몸담으면서 쌓은 실력으로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 ‘올빼미’는 최 332만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2022년 개봉한 영화 중 최장기 박스오피스 1위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