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2019년 방송한 JTBC 드라마 ‘눈이 부시게’는 배우 김혜자의 따뜻하고 뭉클한 내레이션으로 막을 내렸다. 이 작품은 시간을 잃어버리고 한순간에 늙어 버린 스물다섯 청춘 혜자(김혜자·한지민)의 삶을 통해 의미 없이 흘려보내는 시간과 당연하게 누렸던 순간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짙은 여운을 남겼다.
그로부터 6년 뒤 ‘눈이 부시게’의 제작진과 김혜자가 다시 만났다. 삶의 유한함을 이야기했던 이들은 지난 19일 방송을 시작한 JTBC 토일드라마 ‘천국보다 아름다운’을 통해 죽음의 무한함에 대해 말한다. 죽음을 단지 삶의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으로 바라보는 드라마는 사후 세계를 배경으로 삶과 인연, 성장의 의미를 새롭게 짚어낸다.
‘천국보다 아름다운’은 삶의 끝에서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부 생활을 그리는 드라마다. 천국에 도착한 이들은 누구와 함께 살고, 몇 살로 살아갈 것인지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80대에 죽어 천국의 문 앞에 도착한 이해숙(김혜자)의 선택은 일생의 희로애락을 함께하며 깊이 사랑해온 남편이다. 그리고 “당신은 지금이 제일 예쁘다”고 했던 생전 남편의 말을 떠올리며 천국에서도 80대로 살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천국에 도착하니 남편 고낙준(손석구)은 자신의 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한 채 30대 청년의 모습으로 해숙을 기다리고 있었다. ‘엄마와 아들’처럼 보이는 외모에 해숙은 좌절하지만 자신을 여전히 사랑하는 다정한 남편과 천국에서의 새로운 일상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기발한 설정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알츠하이머에 걸린 70대 주인공 혜자의 반전 서사를 통해 깊은 울림을 전했던 ‘눈이 부시게’의 제작진이 다시 뭉친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더욱 주목을 모았다. ‘눈이 부시게’와 ‘나의 해방일지’를 연출한 김석윤 PD가 연출하고, 이남규·김수진 작가가 뭉쳤다. 앞서 열린 제작발표회에서 김 PD는 “이 작품은 김혜자 선생님을 기획단계부터 정해놓고 만들었다. 이남규, 김수진 작가는 본인들이 쓰던 대본을 중단하고 ‘김혜자 프로젝트’에 올라탔다”면서 “어떻게 하면 김혜자라는 배우가 모든 걸 쏟아부울 수 있는 판을 만들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야말로 ‘김혜자 맞춤형’ 작품“이라고 밝혔다.

● 천국에서도 지옥에 갈 수 있다? 천국의 또 다른 얼굴
드라마 속 천국은 단순한 환상이 아닌 현실적인 디테일로 설계된 세계다. 지하철이라는 익숙한 교통수단을 타고 저승으로 향하고, 천국에 도착하면 보안검색대를 거쳐 상담 창구에서 자신의 삶을 정리한다. 이승에서의 삶이 끝난 뒤에도 그리 다르지 않은 일상은 천국이란 결국 우리가 살아온 삶의 또 다른 거울일지도 모른다는 인상을 남긴다. 익숙함과 낯섦이 공존하는 이 설정은 사후 세계라는 거대한 개념을 보다 설득력 있게 풀어낸다.
무엇보다 상상의 세계를 단단하게 지탱하는 인물은 단연 김혜자다. ‘김혜자 프로젝트’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김혜자는 해숙을 통해 한계 없는 연기 스펙트럼을 아낌없이 펼친다. 이승에서는 세월의 풍파를 견디며 살아온 억척스러운 ‘일수꾼’이자 남편 앞에서는 여전히 소녀처럼 사랑스러운 아내였고, 천국에서는 솔직하고 엉뚱한 매력을 지닌 신입 주민으로 변신해 다채로운 얼굴을 선보이고 있다. 삶의 질곡을 버텨낸 단단함과 낯선 세계를 마주한 천진함을 동시에 풀어낼 수 있는 건 오직 김혜자만이 가진 힘이다.
“천국은 상이 아니다. 여기서도 잘못하면 지옥에 갈 수 있다”는 천국지원센터장(천호진)의 말처럼 드라마가 그리는 천국은 영원히 머무는 낙원이 아니라 각자가 선택한 모습과 방식으로 또 다른 삶을 살아가는 공간이자 이승에서 미처 마주하지 못했던 감정과 오해, 그리움을 마주하고 정리하는 또 하나의 ‘현생’이다. 제작진은 이승에서 풀리지 않은 감정의 응어리를 하나씩 꺼내 마주하는 과정을 통해 삶과 인연에 대한 짙은 메시지를 예고하고 있다.
총 12부작으로 공개되는 이 작품은 3회부터 본격적으로 여러 인물들이 얽히고설키며 이야기를 확장해 나간다. 낙준에게 안긴 수상한 여인인 솜이(한지민)의 등장과 해숙을 잊지 못하고 뛰쳐나간 이영애(이정은)의 돌발 행동이 더해져 호기심과 긴장감을 불어넣었다. 마냥 아름답지만은 않은 해숙의 두 번째 삶이 풀리지 않은 감정과 엇갈린 인연 속에서 어떤 결말을 향해 나아갈지 궁금증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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