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로의 목숨을 노릴 때도, 서로를 믿고 의지할 때도, 바둑판을 앞에 두고 치열한 승부를 펼칠 때도, 배우 이병헌과 조우진은 최상의 시너지를 발휘한다. 10년 전 영화 ‘내부자들’에서 시작된 이들의 인연이 ‘남한산성’과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을 거쳐 새 영화 ‘승부’에서도 빛을 발하고 있다. 만날 때마다 관객과 시청자의 기대에 부응하는 탁월한 호흡을 자랑하면서 함께 하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게 한다.
이병헌과 조우진이 ‘승부'(감독 김형주·제작 영화사 월광)에서 또 재회했다. 바둑계 전설들의 실화를 옮긴 이야기에서 이병헌은 한국 바둑을 상징하는 인물 조훈현 9단으로, 조우진은 라이벌 남기철 9단으로 만났다. 영화는 조훈현과 이창호 9단이 1990년대에 벌인 사제 대결 실화를 극화했다. 극을 이끄는 중심은 이병헌과 이창호 국수를 연기한 유아인이지만 이들 못지 않은 존재감을 발휘하는 배우가 다름 아닌 조우진이다. 조훈현을 긴장케 하는 인물이자, 이창호에게 ‘이기는 바둑’의 길을 일깨우는 결정적인 인물로 활약한다.
특히 조우진과 이병헌이 함께 할 때마다 이야기는 막강한 에너지를 발휘한다. 이들이 팽팽하게 맞붙는 대국에서 조훈현이 필살기인 다리 떨기를 통해 상대방을 짓누르는 승부수를 던지는 장면은 압권이다. 승리의 기쁨을 한껏 즐기는 조훈현과 쓰라린 패배감과 모멸감을 느끼는 남기철의 엇갈린 표정은 매 순간 승패가 나뉘는 바둑의 세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제자에게 패한 조훈현이 깊은 슬럼프에서 허덕일 때 그를 다시 바둑판 앞에 앉게 한 인물도 다름 아닌 남기철이다.
영화에는 조훈현과 이창호 등 실존 인물들이 주인공이지만 조우진이 연기한 남기철 9단은 여러 프로 기사들의 특징과 사연을 조합해 만든 허구의 인물이다. 이에 조우진은 실존 인물을 표현해야 하는 다른 배우들과 달리 부담을 덜고 좀 더 자유롭게 자신의 캐릭터를 표현할 수 있었다.
촬영 당시 이병헌과 조우진이 주고받은 에너지는 실제로 이들을 한껏 자극했다. 조우진은 ‘승부’를 처음 소개하는 제작보고회 당시 “이병헌 선배의 눈만 바라보면 없었던 몰입감이 생길 정도로 잘 인도해준다”며 “아주 작은 동작에서도 정말 모든 감정을 담아내는 모습을 보며 감탄하면서 연기했다”고 돌이켰다. 이를 증명하듯 지난달 26일 개봉한 영화는 2주 연속 박스오피스 1위를 지키면서 6일까지 누적관객 135만명(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을 동원했다.

● 처음 만난 ‘내부자들’이 남긴 강렬한 인상
이병헌과 조우진의 첫 만남은 우민호 감독이 연출한 영화 ‘내부자들'(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이다. 2015년 개봉 당시 본편으로 707만명, 확장판인 ‘디 오리지널’ 버전으로 208만명을 동원하면서 총 900만 관객을 사로잡은 흥행작에서 이들의 인연은 시작됐다.
첫 만남부터 강렬했다. 정치 깡패 안상구, 재벌 회장의 궂은 일을 도맡는 조상무로 만난 이들은 서로의 목숨을 노리는 극악무도한 행동으로 긴장감을 형성했다. 컨테이너 안에서 안상구의 손목을 자르는 조상무, 조상무의 발목을 자르는 안상구의 공격적인 장면은 여전히 영화 팬들의 기억에 또렷하게 각인돼 있다.
조우진은 이병헌과 만날 때마다 대표작을 새롭게 썼다. ‘내부자들’을 통해 배우로 도약했고, 2017년 영화 ‘남한산성'(감독 황동혁·제작 싸이런픽쳐스)으로 연기력을 확실하게 증명했다. ‘남한산성’은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숨은 임금과 조정이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청나라에 맞서는 이야기다. 이병헌은 조선의 충신이자 실용주의를 취하는 최명길 역으로, 조우진은 노비 출신의 청나라 역관 정명수 역으로 다시 만났다. ‘내부자들’ 때처럼 이번에도 힘의 균형이 엇갈린 상황. 나라의 운명이 비극으로 치닫는 가운데 서로 다른 목적을 지닌 인물들로 참담한 역사극을 완성했다.

영화에선 주로 반목했지만 드라마에서는 달랐다. 2018년 tvN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3번째 만난 두 배우는 189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미국의 국적을 지닌 조선인 유진 초이와 역관 임관수로 호흡을 맞췄다. 이병헌은 우여곡절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 군인으로 성장한 미국인으로, 조우진은 고국으로 돌아온 그를 돕는 역관 역이다. 앞선 두 편의 영화에서 서로에게 칼날을 거둔 자리를 웃음으로 채웠다. 서로를 은근히 공격하면서도 단단하게 신뢰를 쌓아가는 관계를 보이며 드라마 성공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10년 동안 쌓은 신뢰는 ‘승부’에서도 확인된다. 분명 라이벌 관계이지만 이들은 바둑의 세계에서 함께 살아가는 동료이자 친구의 모습도 보인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들이키고 힘들어 하는 조훈현에게 따뜻한 차와 우산을 건네는 남기철의 담담한 행동은 사제 대결이 형성한 차가운 긴장감에 온기를 불어넣으면서 관객을 영화에 더 깊이 빠져들게 한다. 오랫동안 호흡한 이병헌, 조우진이어서 가능한 호흡이다.
이들은 완성된 영화를 보고 서로의 연기에 자극을 받기도 한다. 조우진은 ‘승부’에 대해 “이병헌 선배의 화려한 타이틀 방어전을 목격하는 기분이 든다”고 놀라워 하면서도 “제가 연기한 남기철 사범은 그림자 같은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연기했다. 화려한 사제 대결의 진정한 의미를 내조할 수 있도록 표현했다”고 돌이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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