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긋지긋할 정도로 끈질긴 악연(惡緣). 썩은 부위를 도려내듯, 가위로 잘라내듯, 완전히 끊어내고 싶지만 쉽지 않다. 벗어나려 발버둥치지만 그럴수록 발이 푹푹 빠져버려서 깊은 늪을 나오기 버겁다.
4일 공개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악연’은 헤어 나올 수 없는 관계의 굴레를 그린 6부작 드라마다. 지독하게 얽힌 6인의 인물들은 사채남(이희준)과 조선족 장길룡(김성균), 한의사 안경남(이광수)과 그의 여자친구 유정(공승연), 목격남(박해수)과 의사 주연(신민아)이다. 이유를 알지 못한 채 뒤엉킨 이들의 관계를 하나씩 풀어가는 과정이 ‘악연’의 주된 스토리다.
‘악연’은 최희선 작가의 동명 웹툰이 원작이다. 황정민과 강동원 주연의 2016년 영화 ‘검사외전’으로 데뷔한 이일형 감독이 극본과 연출을 맡았다. 제작진은 주요 등장인물들의 배경과 설정을 베일에 감춰 두고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하나씩 비밀을 풀어간다. 원작을 보지 않았다면 좀처럼 예측할 수 없는 전개 방식을 취한다. 그만큼 스포일러를 경계해야 하는 작품이라는 의미다. 이제부터는 ‘악연’에 관한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다.
● 6인의 실타래
폐건물에 놓인 의자에 누군가 묶여있다. 그 앞에 휘발유가 마구 뿌려지고 이내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진다. 소방대원들과 경찰이 화재 현장에서 생존자 남성을 구조한다. 하지만 피부 전체에 화상을 입은 탓에 얼굴을 알아보기 어렵고, 카메라도 의도적으로 남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의사 주연은 신원미상의 남자의 이름이 박재영이라는 사실을 듣고, 진료 차트에 쓰다가 멈칫한다.
1회 오프닝은 화재 사건의 전말에 대해 의문점으로 남겨둔 채 화재 발생 15일 전으로 돌아가 챕터를 하나씩 열기 시작한다. 바로 이어지는 장면에서 ‘누군가’의 정체가 사채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그가 생존자인지는 아직 알 수 없다. 그렇다면 사채남은 왜 그 시간과 장소에 있었고 왜 의자에 묶여있었을까.
‘악연’은 단박에 그 진실을 펼쳐놓기보다 조금씩 천천히 단서를 제공하면서 시청자가 직접 비밀을 조립하게 만든다. 장길룡, 안경남, 유정, 목격남, 주연의 에피소드가 순차적으로 공개된다. 이일형 감독은 데뷔작 ‘검사외전’에서처럼 본인의 장기를 발휘해 텅 비어있던 퍼즐 판에 단서를 담은 조각을 하나씩 맞추면서 그림을 완성한다. 마지막까지 보고나면 무릎을 ‘탁’ 치게 될지도 모른다.
● 인간의 밑바닥과 본성 탐구
막다른 절벽에 내몰린 순간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하게 될까. 여러 부류로 나뉠 수 있지만 ‘악연’이 주목하는 인간들은 죄를 수습하려 더 큰일을 만들어내는 족속이다. 임시방편으로 사건을 덮기 위해 양심을 고이 접어 넣어두고 애써 눈 감았던 것들은 어느새 산더미처럼 불어나 본인을 덮치고야 만다. 현미경을 들이밀어 인간의 적나라한 본성을 관찰하는 ‘악연’은 꾸미거나 포장하기보다 그대로를 시청자에게 제시한다.
6인의 캐릭터들을 살펴보자. 이희준이 연기한 사채남은 1억3000만원 가량의 빚을 진 상태다. 독촉 전화를 무시하고 태평하게 명품 시계와 자동차를 소개하는 영상들을 보며 언젠가 갖겠다는 허황된 꿈을 좇으며 살아간다. 결국 사채남의 집으로 채권자가 찾아오고, 한달의 기한 내에 돈을 갚지 않으면 장기를 적출을 하게 될 거라고 협박한다. 공장 노동자인 사채남에게 그런 큰돈이 갑자기 생길 리 없고, 그 때 지독한 수를 떠올린다. 아버지의 생명보험 5억원을 손에 넣겠다는 욕심이다.
김성균이 연기한 조선족 장길룡은 사채남과 같은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다. 매달 월급이 나올 때마다 고향으로 따박따박 돈을 붙여야 하는 처지지만 돌연 공장장이 해고를 통보했다. 감옥을 다녀온 범죄자 신분인 장길룡은 먹고 살길이 막혔다. 그런 사정을 알게 된 사채남은 생명보험금 일부를 줄 테니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달라는 청부 살인을 부탁한다. ‘악연’의 모든 시작점은 사채남의 음흉한 생각에서부터 발화했다. 그들은 위험한 범행은 또 다른 파국으로 이어진다.
한의사 안경남과 여자친구인 유정도 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은근한 권력관계가 스며들어 있다. 개업 이후 돈을 벌자 의기양양한 안경남은 예쁜 여자친구 유정에게 뭐든 해주려고 한다. 두 사람은 근교 펜션으로 여행을 떠난 날, 밤중에 유정은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빨리 가봐야 한다고 말하면서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한쪽에서 이들과 관계 없어 보이는 의사 주연은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매일 밤 악몽을 꾼다. ‘악연’은 6인의 인물들이 종국에 어떤 악연으로 뒤엉켜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끝에는 추악하고 더러운 인간의 민낯이 있다.
● 무뎌진 폭력과 그 파장
시청 등급이 19세 이상 관람가인 ‘악연’은 이야기를 묘사하는 수위가 높다. 폭력의 근원에 숨어 있는 불편한 진실을 꺼내기 위해 표현의 수위를 높인 것으로 보인다. 이에 얽힌 인물들은 처음 폭력 앞에서 머뭇거리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무뎌지고 익숙해진다는 것이 ‘악연’의 핵심이다.
‘악연’은 무심코 한 행동이 가져오는 파장과 폭력이 더 큰 폭력을 낳는 상황들, 그리고 그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인물들이 주로 머무는 배경인 도시인 구회시 얽힌 과거의 불편한 사건들, 죄를 저지르고도 타인의 탓으로만 몰아세우고 외면하는 과정이 어떤 결말을 낳는지 따라가는 재미가 있다.
이일형 감독은 “시청자들이 6부작 내내 긴장감을 느끼면서 보게 만들어야 한다는 점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다”며 “6명의 캐릭터가 여러 사건을 겪으며 어떻게 악연으로 얽히는지 시청자들이 한번에 인지하는 게 아니라 실타래가 풀 듯 알아가길 원했다”고 밝혔다. 이어 “6부작의 이야기가 끝나야 완성되는 악연을 보이려고 했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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