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릎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스커트와 코트를 갖춰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묶은 소녀 반스(소피 대처)와 팩스턴(클로이 이스트)는 후기 성도교회, 즉 모르몬교(Mormonism)의 선교사다. 남들의 비웃고 조롱하는 시선에도 충만한 믿음을 지닌 두 사람은 집집마다 전도를 하러 다닌다. 그러던 중 명단에 적힌 외딴 집에 방문하고 집주인인 중년의 남성 리드(휴 그랜트)를 만나게 된다.
거센 폭우가 몰아치는 와중에도 현관문 앞에서 하나님의 교리를 전달하는 어린 선교사들에게 리드는 집안으로 들어오라는 친절을 베푼다. 리드의 제안에 이들은 ‘여성 룸메이트가 없으면 출입할 수 없다’고 정중히 거절하지만 아내가 있다는 말에 안심하고 문턱을 넘는다. 아늑하고 포근한 집안의 분위기와 곳곳에 켜진 밝은 전등, ‘이 난장판에 축복'(Bless this mess) 글귀가 적힌 액자, 블루베리 파이 냄새가 풍겨오며 긴장감도 풀린다.
하지만 대화를 거듭할수록 어딘가 불편하고 께름직한 느낌이 감돈다. 선교를 하러 온 입장이지만 도리어 질문을 받고 판단 당하는 처지가 된다. 참된 종교의 가치, 모르몬교의 일부다처제 폐지에 관한 생각을 묻는 리드의 말에는 위화감이 배어있다. 집안에 있다던 아내는 모습을 비추지 않고, 내온다던 블루베리 파이는 사실 향초 냄새였다. 이에 두 선교사는 문을 열고 도망치려고 애쓰지만 굳게 잠겨있다. 이상함을 느낀 순간, 이미 늦어버렸다.

● 종교와 공포 장르의 유사성
영화 ‘헤레틱’은 절대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온전한 신앙심을 기반 삼아 확장해온 종교를 공포 영화 장르를 이용해 해체한다. 도대체 믿음은 어디서 비롯됐고 어떤 행동력과 동기로 유지되는 것인지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20세기 중반부터 심리학자들 사이에서 논의된 통제 시스템으로서의 종교의 역할을 묻기도 한다.
“아직도 옆방에 내 아내가 있다고 믿나요? 이 모든 정황을 봤을 때요.” 애써 외면해왔던 상황을 관통하는 리드의 말 한마디는 섬뜩함을 안긴다. 뒤이어 모노폴리 보드게임을 꺼내놓더니, 유일신에 관한 본인의 논리를 줄줄이 늘어놓는다.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같은 출발점에서 시작해 메시지가 희석되고 의미가 퇴색됐다고 설교하는 리드의 모습은 교단에 선 교주 혹은 광신자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빔 프로젝트에 각종 자료들과 이미지를 띄우고 자신의 믿음을 설파하는 리드의 얼굴에서 강한 확신이 느껴진다.
리드가 설명하는 종교의 변형은 영국의 팝 록 그룹 홀리스가 1972년 부른 ‘디 에어 댓 아이 브리드'(The Air That I Breathe)과 영국의 록밴드 라디오헤드가 1992년 발매한 ‘크립'(Creep), 미국의 가수 라나 델 레이가 2017년 내놓은 ‘겟 프리'(Get Free)의 유사성으로 치환된다. 당시 ‘크립’은 홀리스의 ‘디 에어 댓 아이 브리드’에게 표절 시비가 붙었고, 마찬가지로 ‘겟 프리’는 ‘크립’과 비슷하다는 이유로 표절 소송을 당했다. 적막을 깬 노래 ”디 에어 댓 아이 브리드’를 두고 “어디서 들어본 적 없냐”는 리드의 물음은 대부분의 종교가 비슷한 신화를 바탕으로 파생되어왔다는 의미와 비슷하다. 리드의 논리에 따르면 모든 종교는 “그저 장식”이자 “허황된 자본주의의 엉터리 게임”이다.
마리오네트 인형을 가지고 노는 어린 선교사들을 보면서 만족스러운 미소를 띄고 허점 가득한 논리를 관철시키려 압박하는 리드는 인상적이다. ‘센스 앤 센서빌리티’ ‘노팅힐’ ‘브리짓 존스의 일기’ ‘러브 액츄얼리’ 등 로맨스 영화에서 특유의 눈웃음으로 익숙하던 휴 그랜트는 괴팍하고 의뭉스러운 집주인 리드가 돼 시선을 사로잡는다.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1995년 영화 ‘세븐’의 존 도(케빈 스페이시)가 그리스도교에서 규정한 7가지 죄악에 맞춰 살인을 저지른다는 괴팍한 논리처럼 ‘헤레틱’의 리드도 본인의 확실한 철학을 지닌 광기를 보여준다.
휴 그랜트의 연기에 화학 작용을 일으키는 소피 대처와 클로이 이스트는 최근 영화 ‘컴패니언’과 ‘파벨만스’로 주목받은 신예다. 리드에 의해 지속적으로 신앙심에 시험에 드는 과정에서 느끼는 실체 없는 두려움과 균열의 감정들은 미세한 떨림으로도 고스란히 전달한다. 궤변 같은 이야기에 지지 않고 반박하고, 빠져나갈 방법을 강구하는 절실함도 있다. 박찬욱 감독의 ‘친절한 금자씨’ ‘박쥐’ ‘아가씨’의 정정훈 촬영감독은 밀폐된 공간과 한정된 동선 안에서의 반응들을 즉각적으로, 적재적소에 앵글에 담아내 집중도를 높인다.
집 밖으로 나가길 희망하는 두 사람의 요청에 리드는 한 가지 제안을 한다. 두 개의 문에 각각 ‘BELIEF'(믿음)과 ‘DISBELIEF'(불신)라는 글자를 적는다. 둘 중의 하나의 문만을 선택하라는 것. 고약한 장난이라기엔 소름끼치는 리드의 제안에 정말 밖으로 향하는 통로가 있을지 의문스럽지만 선택해야만 한다. 그 아래에 끔찍한 진실이 숨겨져 있을지라도.
2018년 공포영화 ‘콰이어트 플레이스’를 각본을 쓴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감독은 소리를 내면 안 되는 극한의 상황을 밀도있게 담은 본인들의 장기를 ‘헤레틱’에도 그대로 적용한다. 반스와 팩스턴을 궁지에 몰게 한 실체는 무엇일까. ‘헤레틱’은 종교라는 보이지 않는 실체를 공포 장르로 영리하게 풀어낸다.

감독 :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 각본 : 스콧 벡, 브라이언 우즈 / 출연 : 휴 그랜트, 소피 대처, 클로이 이스트 외 / 개봉일: 4월2일 / 상영등급 : 15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11분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