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우내 한껏 웅크리다 존재감을 틔워내는 봄은 유독 호로록 지나간다. 언제 닥쳐왔는지도 모를, 봄날의 감각은 유난히 요망지기까지 하다. 1967년, 흐드러지게 피어난 유채꽃 밭에서 열일곱 관식(박보검)과 열여섯 애순(아이유)이 서로를 향해 꾹꾹 눌러 담고 있는 마음을 고백하는 일은, 새로운 씨앗을 꿈틀거리게 하는 시작이었다.
관식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꽃천지인 봄처럼 걷잡을 수 없이 번진 첫사랑을 깊숙하게 뿌리내린다. “소 죽은 귀신이 씌었나, 뭔 놈의 게 지껄이지를 않아?”라는 애순의 타박은 절묘하게도 관식으로 하여금 별다른 말이나 표현 없이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게 한다. 가족들의 반대에 맞서 부산으로 사랑의 도피(?)를 하고, 생이별할 위기 앞에서도 관식은 망설임 없이 배 위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애순에게로 향한다. 그들의 봄은 단단한 토양의 표면을 뚫고 맨몸으로 부딪혀 모든 것을 피워내는 계절이기도 했다.
“이제 막 초봄을 지나는 중이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폭싹 속았수다'(극본 임상춘·연출 김원석)의 박보검은, 피고 지는 인생을 순환하는 계절에 빗대어 묘사하는 작품 속 관식처럼 새로운 가능성과 도전 앞에서 온몸을 펼칠 준비를 마쳤다. 얼핏 단순해 보이지만 무쇠마냥 단단한 관식이 “말이 아닌 행동으로 본인의 생각과 의지를 표현하는 것이 굉장히 용감하고 대담하게 느껴졌다”는 박보검은 “(나도)군대를 다녀온 이후 작품을 보는 눈이나 캐릭터의 방향성이 이전보다 과감해졌다”고 말했다.
조금씩, 천천히 씨앗이 자라나 어느새 꽃이란 형태를 갖추듯, 반복해서 봄, 여름, 가을 그리고 겨울을 마주할 박보검은 향긋한 꽃내음이 풍기는 봄으로 “새로운 챕터”를 활짝 열었다.
● 누군가의 ( )인 관식에게 배운 것들
투박하지만 굳세다. 누군가의 아들이자 남편, 아버지가 되는 관식은 삶의 무수한 굴곡 안에서도 두 다리로 꿋꿋하게 삶을 지탱한다. 자신의 사람을 잘 챙기는 일, 그 첫 손은 애순이다. 누군가는 속없는 놈이라고 손가락질해도, 관식에게는 무엇보다 단순한 이치다. 할머니 막천(김용림)과 어머니 계옥(오민애)에게 핍박을 당하는 애순을 위해 반바퀴를 돌아 든든한 방패막이 되어주기도 한다.
세상 어디에도 없을 것 같은 유니콘 같은 남자. ‘폭싹 속았수다’에서 관식을 부르는 수식어다.
박보검은 “어딘가에는 이런 인물들도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라면서 관식을 관통하는 감정을 이야기했다.
“본인의 사람을 챙기고 사랑하는 마음은 관식처럼 모두 다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저도 연기하면서 닮고 싶다고 생각을 많이 했어요.(웃음) 관식이 애순에게 그럴 수 있던 이유는 부모님의 충분한 사랑을 받았기 때문인 것 같아요. 누군가는 ‘불효자’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요.”
하지만 봄을 지나 도달한 꽈랑꽈랑(제주도 방언·햇볕이 쨍쨍하다)하던 애순과 관식의 여름은 예고 없이 쏟아진 소나기와 일렁이는 파도에 쓸려간다. 각각 열여덟과 열아홉의 어린 나이에 부모가 된 두 사람은 세 남매 금명·은명·동명을 야무지게 길러내고 있었지만, 한풀 꺾이고야 만다. 불의의 사고로 셋째 아들 동명을 잃으면서 휘청거린 탓이다. 꺼이꺼이 목놓아 울지도 못하고 빗물에 씻겨내려가는 관식의 눈물은 그래서 더 애처롭다. ‘폭싹 속았수다’에서 관식이 버겁다는 감정을 드러내는 유일한 순간이기도 하기에.
“신기하게도 그날따라 날씨도 흐리고 비도 내렸죠. 자식을 잃은 슬픔과 아픔을 온전하게 표현하기도, 이해하기에도 어려웠지만 관식과 애순이 쌓아온 시간을 되뇌면서 연기하려고 했어요. 아직 부모가 되어본 적은 없으니까요. 어쩔 줄을 모르는, 일찍이 아빠가 되어버린 관식을 조금이나마 잘 표현하려고요.”
여기저기 생채기 난 마음의 굳은살은 관식의 손과 몸에 그대로 새겨진다. 오징어배를 타다 다쳐 평생 오른쪽 검지를 구부리지도 못하고, 한쪽 다리는 불편해 계단을 오르고 내리기에도 버겁다. 관식은 가족들을 이끄는 선장이 되어 물보라를 온몸으로 막아선다.
어쩌면 안쓰러운 구석이 느껴지는 관식에 대해 박보검은 “안쓰럽다거나 아쉽다고 생각한 순간은 없다”며 “가족들이 무탈했으면 좋겠고, 하고 싶은 것이라면 다 해주고픈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뭘 하지 말걸’, ‘적극적으로 해볼걸’이라는 후회는 있을 것 같다. 그 세상이, 그 시대가 속상했을 뿐이지, 탓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 주변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애순을 위한 튼튼한 울타리가 관식이라면, 그들을 둘러싼 커다란 보호막은 도동리 식구들이다. 해녀 3인방 충수(차미경), 양임(이수미), 경자(백지원)을 비롯해 셋방 할아버지와 할머니까지. 무심하게 들여다보고 챙겨주는 이들은 애순과 관식의 든든한 지원군이기도 하다.
“동명을 먼저 떠나보내고 힘들어하는 두 사람에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챙겨주는 도동리 식구들”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박보검에게서 주변인들에게 받은 사랑을 어떤 식으로 되돌려줘야 할지를 늘 고민하는 정다운 마음이 느껴졌다. 가장 가까이에서 연기한 애순의 아이유에 대해서도, 멀리 떨어져 있지만 연결된 중년 관식의 박해준에 대해서도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덕분이다’고 말문을 여는 박보검의 말투에는 제주도 방언으로 ‘수고 많으셨습니다’를 뜻하는 드라마의 제목 ‘폭싹 속았수다’의 정서가 배어 있었다.
“아이유는 애순과 금명의 1인 2역으로 정말 바빴을 텐데, 잘 표현해 준 덕분에 우리가 모두가 다 공감하면서 재미나게 작품을 보고 있는 것 같아요. 애순은 롤러코스터 같은 인물이라고 생각했죠. 웃다가도 울고, 울다가도 웃으니까요. 동갑내기 친구와 연기할 기회가 흔치는 않은데, 함께 하면서 마음의 체력이 단단한 친구라는 것을 느꼈어요. 좋은 자극이었죠. ‘폭싹 속았수다’라고 이야기해 주고 싶어요.”
“중년 관식인 박해준 선배님 덕분에 청년 관식인 제가 덕을 많이 본 것 같아요. 대본 리딩에서 뵙고 그때의 톤을 기억에 연기에 임했는데, 중년 관식을 안아주고 싶지만 기대고 싶은 듬직한 인물로 연기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이죠. 박해준 선배님 자체도 참 멋진 아빠이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어느덧 올해 데뷔 13주년을 맞은 박보검의 필모그래피는 다양한 캐릭터로 빼곡하게 채워진 만큼, 좋은 동료들과 인연도 함께다. “일할 수 있음에 행복함과 감사함을 느낀다”는 박보검은 본인이 이끄는 KBS 2TV ‘더 시즌즈 – 박보검의 칸타빌레’에 선뜻 출연해 준 2016년 주연작 ‘구르미 그린 달빛’의 김유정, 진영, 곽동연을 떠올리며 “최근에 느낀 가장 큰 행복”이라고 짚었다. “‘우리의 인연이 벌써 10년이 됐구나’ 건강하게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 또 하나의 감동”이라며 웃었다.
이탈리아어로 ‘노래하듯이’라는 뜻을 담은 칸타빌레(cantabile)를 프로그램의 부제로 직접 지은 박보검은 상명대 대학원 석사 과정에서 뉴미디어음악을 전공했듯 “음원이 주는 힘”을 믿고 “더 많이 배워서 도움이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어 ‘폭싹 속았수다’라는 하나의 챕터를 열고 닫으며, 박보검은 ‘이런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고도 말했다.
“임상춘 작가의 글에는 세대를 불문하고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가 담겨 있죠. 사실 군대에 있을 때, ‘굿보이’ 제안을 더 먼저 받고, ‘폭싹 속았수다’를 그 다음에 받았죠. 임 작가의 글을 좋아했던 팬으로 이 이야기에 합류할 수 있다는 기쁨과 설렘이 컸어요. 읽었을 때 감동은 또 김원석 감독의 연출로 어떻게 표현될까도 궁금했죠. 다행히도 ‘굿보이’ 팀에서 편의를 봐주셔서 촬영 일정을 조율해 촬영할 수 있었어요. 어쩜 이렇게 잘 쓰시는지(능청) 다음에도 또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이 크죠.(웃음) 관식뿐만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는 어른들이 멋지게 그려진 것 같아요. 우리 모두 조금 더 서로를 생각하고 사랑하고 좋은 사람이자 어른, 부모님이자 자녀가 되면 좋지 않을까요?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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