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케이티가 밀러를 “인셀”로 부르지 않았더라면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주말마다 밀러를 축구 경기에 내보낸 아빠 에디가 실력이 부족한 아들을 부끄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짓지 않았다면 달라졌을까. 새벽까지 불을 켜고 컴퓨터 앞에 앉아있던 아들의 방문 앞에서 엄마 크리스틴이 ‘학교에 가려면 일찍 자라’고 말하는 대신 방 문을 열어봤다면 어땠을까. 이미 벌어진 비극 앞에서 수없이 되묻는 가정법은 무의미하다.
이른 아침, 에디의 집으로 경찰이 들이닥친다. 문을 부수고 들어온 경찰은 2층에서 잠자고 있던 아들 밀러를 ‘살인 혐의’로 긴급 체포한다. 눈앞에서 벌어진 상황에 깜짝 놀라 옷에 소변을 본 13세 소년 밀러. 에디와 크리스틴은 ‘아들은 죄가 없다’면서 경찰서로 달려간다. 여느 범죄 드라마와 다를 바 없이 시작하는 ‘소년의 시간’은 곧바로 그 진가를 드러낸다. 오프닝부터 한 편의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 60여분에 이르는 이야기를 원테이크로 밀어 붙인다. 단 한 번도 장면을 나누지 않고, 인물과 상황을 집요하게 따라가는 카메라에 시선을 맞춰 숨을 쉴 수 없는 긴장감에 빠져들게 한다. 매회 고집스럽게 완성한 원테이크 기법의 진가가 압도적이다.
‘소년의 시간’은 사건이 벌어진 이후 시간 차이를 두고 밀러와 그 가족의 이야기를 4부작에 담았다. 밀러가 살인 혐의로 체포돼 경찰서에서 처음 조사를 받는 과정을 다룬 1편 ‘첫째 날’에서 출발해 사건을 조사하는 형사들이 밀러와 피해자인 소녀 케이티가 다닌 학교를 찾아가 학생들을 만나는 이야기인 2편 ‘셋째 날’, 보호소에 머무는 밀러와 상담사의 대화로 이뤄진 3편 ‘7개월 뒤’, 그리고 밀러의 가족의 현재를 그린 4편 ’13개윌 뒤’까지다. 처음엔 이틀, 이후로 7개월까지 벌어진 시간의 공백을 두는 드라마는 밀러가 왜 케이티를 죽였는지, 내면에 숨긴 갈망과 왜곡된 욕망을 서서히 드러낸다. 한편으론 미처 알지 못했던 아들이자 동생이 저지른 비극으로 인해 무너진 가족의 처절한 모습도 비춘다.
‘소년의 시간’는 기존의 드라마 공식을 비트는 실험도 한다. 밀러가 범인인지 아닌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소년은 왜 살인범이 됐는지, 소년과 피해자 사이에서는 대체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어른들은 알지 못하고 사실 알 수도 없는 10대들의 내밀한 세계를 파고든다. 비극적인 ‘결과’를 통해 비극이 일어나기까지의 ‘과정’을 역으로 되짚는다. 이때 원테이크 촬영 기법은 전체 분위기에 파격을 더한다. 사실 한편의 영화나 드라마에 극적인 재미를 배가하는 원테이크 시도는 종종 있었다. 롱테이크 기법을 가장 선호하는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SF 액션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이 대표적이다. 이후 ‘로마’ 등 작품에서 원테이크를 적극 활용하면서 작품의 완성도를 최대치로 끌어올리기도 했다.
다만 이번 ‘소년의 시간’은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간다. 기막한 원테이크 기법을 활용해 1편에서는 밀러가 처음 경찰서에 도착해 유전자를 채취하고 머그숏을 찍고 신문을 받고 결정적인 증거를 목도하는 모든 과정을 단 한 번의 컷 이동 없이 유지한다. 보는 내내 밀러와 함께 경찰서의 내밀한 곳에 숨어든 것 같은 숨 막히는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2편도 마찬가지. 사건 담당인 형사 루크와 미샤는 밀러가 다닌 학교를 찾아간다. 교실을 오가면서 학생들을 만나고 때마침 울린 화재 경보에 운동장에 모였다가 갑자기 벌어진 폭력 사태로 혼란을 겪고, 돌연 달아나는 밀러의 친구를 뒤쫓아 붙잡는 일련의 과정을 원테이크로 담았다. 실제 촬영 자체는 원테이크로 하지 않았지만 보는 이들에게는 롱테이크로 보이도록 구성한 ‘치밀하다 못해 완벽한 동선’에 입각한 서사의 전개가 놀라울 뿐이다.

하지만 기술은 메시지를 뛰어넘을 수 없다. ‘소년의 시간’은 학교에 간 루크와 아들의 비밀을 몰랐던 에디라는 두 명의 가장 혹은 기성세대를 통해 실시간으로 모든 걸 공유하고 비밀스러운 은어와 상징으로 의사소통을 나누는 SNS 시대를 살아가는 10대의 세계를 반추한다. 루크는 학교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밀러와 케이티가 친구 사이였는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묻는다. 아이들은 루크의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하고 웃음과 농담으로 일갈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 학교에는 비밀이 없다. 경찰은 숨기려 하지만 교사들도, 아이들도 밀러 사건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다. ‘진실의 은폐’와 ‘진실의 확산’의 그 어디쯤에서 어른들은 방향을 잃는다.
보다 못한 루크의 아들은 아빠를 따로 불러 밀러와 케이티 사이에서 오간 ‘인셀’이라는 단어를 알려준다. 최근 영미권에서 등장한 신조어인 ‘인셀'(Incel·Involuntary celibate)은 비자발적으로 순결주의나 독신주의자가 된다는 의미로 해석 가능하다. 평소 스스로를 못생겼다고 여기고 주말마다 아빠와 갔던 축구 경기에서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아빠의 표정을 지켜봐야 했던 밀러는 내심 케이티에 마음을 표하려 한다. 하지만 돌아온 건 모두가 볼 수 있는 SNS 댓글에 달린 ‘인셀’이라는 단어였다. ‘앞으로도 연애를 할 수 없을 것’이라는 뜻을 내포한 놀림이다.
보호소에 수감된 밀러와 상담사의 대화 장면으로 52분을 꽉 채운 3편에서 ‘소년의 시간’은 마침내 숨겨왔던 비밀을 드러낸다. 13세에 불과한 소년이 어떻게 살인자가 됐는지, 그 내면에 움튼 왜곡된 욕망과 이에 대한 가치 판단 없이 SNS를 통해 확산하고 공유되는 10대의 어긋난 성인지의 비극이 모습을 드러낸다. 순수한 소년의 얼굴로 핫초코를 먹는 밀러의 모습과 분노에 휘말려 비뚤어진 성인지를 드러내는 밀러의 광기가 교차할 땐 섬뜩하다. 부디 현실에선 이런 일이 없기를, 밀러의 이야기는 픽션의 드라마 ‘소년의 시간’에만 머물길 바라는 마음도 생긴다. 안타깝게도 현실은 더 잔혹할 때가 많다.
배우들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다. 원테이크 촬영상 동선부터 상황에 따른 미묘한 표정의 변화까지 실수 없이 소화해야 했던 배우들은 실제 그 인물이 된 듯한 사실적인 명연기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출연하는 모든 배역의 모든 배우의 연기가 빈틈이 없다. 이번 드라마로 연기를 시작한 10대 연기자 오언 쿠퍼는 앞으로 기억해야 할 이름이다.
영화 ‘미나리’부터 ‘삼체’까지 최근 전 세계를 사로잡은 기발하고 독창적인 작품에 총괄 프로듀서(Executive Producer)로 참여하는 할리우드 배우 브래드 피트가 이번 ‘소년의 시간’도 맡았다. 이제 막 공개했지만, 에미상 등에서 수상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시리즈다.

연출 : 필립 바란티니 / 각본 : 최태강 / 출연: 스티븐 그레이엄, 오언 쿠퍼 / 장르: 범죄 스릴 / 공개일: 2025년3월13일일 / 관람등급: 15세 이상 시청가 / 회차 : 4부작 / 스트리밍 : 넷플릭스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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