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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서에 있는 주문 같기도, 어쩌면 위로를 건네는 문장, 그것도 아니라면 일종의 다짐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영화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는 제목처럼 따스한 응원이 배어있다. 타인의 아픔과 상실의 깊이를 지레 짐작하거나, 빨리 상처가 낫길 바라는 어설픈 권유는 넣어뒀다. ‘누군가의 한숨, 그 무거운 숨을 내가 어떻게 헤아릴 수가 있을까요’라고 읊조린 가수 이하이의 노래 ‘한숨’이 연상되기도 하고, 섣불리 판단하려는 태도도 경계한다.
김혜영 감독의 장편영화 데뷔작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는 교통사고로 엄마를 잃은 고등학생 소녀 인영(이레)이 하루하루의 이별을 버텨내면서 살아가는 성장기를 보여준다. 안전한 그늘막 없는 인영의 홀로서기에 세상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끼니를 챙겨주는 사람이 없어서 유통기한이 지난 상한 식빵을 먹고, 빨래더미에서 빨지 않은 양말을 다시 꺼내 신기도 한다. 그런 인영의 꿈은 무용가다. 서울국제예술단 소속으로 한국 무용을 하는 인영은 돈이 없어서 무료로 수강을 하는데 그게 소문의 중심이 된다. 월세가 밀려 살던 집에서도 쫓겨날 위기다.
막다른 절벽에 내몰린 듯한 인영의 삶은 팍팍하지만 영화는 그의 시간을 무겁게만 그리지 않는다. 이병헌 감독의 영화 ‘극한직업’과 ‘바람 바람 바람’의 조감독을 거치고 드라마 ‘멜로가 체질’의 공동 연출을 맡았던 김혜영 감독은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에 은은한 코미디를 섞어 파안대소를 자아내게도 한다. 인영은 슬픔에 잠식돼 움츠러들어지 않는다.
소꿉친구인 도윤(이정하)을 빼면 속 마음을 터놓을 친구도 없지만 주눅들지 않는다. 급식실에서 홀로 입이 찢어질 듯 벌려 상추쌈을 야무지게 먹고, 자신을 무시하고 험담하는 예술단 단원들의 공격에 다리를 걸어 맞대응하기도 한다. 생글생글 웃음을 짓고 톡 쏘는 말로 지적하는 인영은 오히려 세상에 아무런 걱정도 근심도 10대 소녀의 모습이다. 사실 이런 ‘척’이 꿋꿋하게 세상을 살아가는 그녀만의 방식이다. 탈의실에서 단원들이 모두 나가고 나면 참아왔던 숨을 몰아쉬고, 고된 연습이 끝나고 삼삼오오 부모님이 기다리는 아이들 틈에서 어둠 속을 걸어갈지라도 인영은 애써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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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툴지만, 발맞춰 걷는 아이와 어른
사정을 봐주기 어렵다는 집주인의 말에 인영은 갈 곳을 잃지만, 그렇다고 울음을 토해내거나 주저앉지 않는다. 집 안에 팔 만한 물건들을 중고거래 사이트에 올리는 생활력이 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부터 24시간 패스트푸드점에서 밤을 보내고 학교를 오가던 인영은 임시방편으로 예술단 연습실에서 몰래 지내기로 한다. 인영의 새로운 보금자리는 하필이면 ‘마녀’로 불리는 예술단의 안무가이자 감독인 설아(진서연)에게 들키고 만다. “왜 여기 살고 있냐”는 설아의 물음에 “살 곳이 없어서요”라고 인영은 답한다. 보호자 없이는 호텔도, 밤 10시가 지나면 PC방과 찜질방에도 머물 수 없는 미성년자인 인영을 설아는 우선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간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는 거창하지 않지만 ‘보듬어줄 작은 관심’이 필요한 이들이 서툰 한집살이를 시작하면서 흥미로운 이야기가 시작된다. 다 자랐다고 생각한 어른의 결핍과 보호가 필요한 아이의 마음 속 빈 공간은 따스한 말과 관심으로 꽉꽉 채워진다. 다가갈 틈이라곤 없고, 강렬한 카리스마를 풍기는 설아 앞에서 인영은 단순한 사고 방식으로 눈치 보지 않고 할 말을 다 토해낸다. 둘 사이의 벽은 그렇게 허물어지고, 설아의 커다란 집은 사람의 온기로 가득 찬다. 하루의 안부를 묻고, 들어오길 기다리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둘의 일상은 충만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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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설아와 인영을 통해 살아온 경험을 빗대 자신만의 판단을 고집하는 어른들의 기준이 10대들의 유연함과 얼마나 다른지 꼬집는다. 예술단 소속의 에이스 나리(정수빈)를 둘러싼 이야기도 그렇다. 과거 예술단에서 설아와 함께 연습하던 나리의 엄마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꿈을 딸에게 주입한다. 초조한 나리는 예술단의 60주년 공연에 맞춰 진행된 개인 오디션에서 실수를 한다. 칭찬을 받은 인영이 못마땅한 나리는 돈을 내지 않고 다니는 것을 지적하고, 순식간에 몸싸움으로 번진다. 하지만 그 갈등은 ‘미안하다’는 사과의 한마디로 해결된다. 딱딱하게 경직된 어른들과는 다른 모습이다.
완벽주의를 강요하던 설아의 교육 방식도 화해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통해 변화한다. “아이만 어른에게 영향을 받는 게 아니다. 어른도 아이에게 영향을 받고 자라기도 한다”는 김혜영 감독의 말처럼 설아와 인영의 동거는 단순한 공간의 공유 그 이상의 성장을 의미한다.
● 애도와 상실을 위한 약
내상이 쌓인 인영은 상실을 회복할 힘을 의외의 방식으로 채운다. 동네 약국의 약사인 동욱에게 “짜증날 때 먹는 약이 있냐”고 물으면, 그는 “한번 잡사봐”라며 비타민을 건넨다. 강철 멘탈 같은 인영이 마음의 빗장을 풀고 솔직한 마음을 털어놓는 동욱과의 대화는 어떠한 약보다 효과가 있다. 동욱의 약국은 인영의 한숨을 길게 내뱉을 수 있는 상담소이자 쉼터다. 강한 척을 할 필요도, 버거움을 감출 이유도 없다. “미성년자는 너무 불공평한 것 같아요. 힘든 건 어른이랑 똑같은데, 쌩으로 버텨야 하잖아요”라는 투정을 핑계로 왈칵 눈물을 쏟아내기도 한다.
고단한 삶에 잔소리하는 어른이 아니라 “심심해, 더 놀다 가”라는 친구 같은 어른 동욱이 인영에게는 필요한 치료제다. ‘멜로가 체질’에서 광고감독 상수로 출연해 김혜영 감독과 인연을 맺은 손석구가 동욱 역을 맡아 은근한 유머 코드로 이야기에 위로의 향기를 불어넣는다. 드라마에서 “결명자차를 왜 먹어요?”라는 다큐멘터리 감독 은정(전여빈)의 순수한 물음에 “고소해”라고 단순 명료한 답변을 내렸던 상수의 이상하고 독특한 매력이,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의 약사 동욱에게도 묻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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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무언가를 먹는 장면은 인영을 마음과 상태를 대변한다. 급하게 입에 물었던 식빵부터 급식, 편의점에서 유통기한이 지나기를 기다리는 도시락, 설아의 생일날 끓여준 미역국까지 먹는 행위가 유독 부각된다. 심지어 예술단 연습실에서 몰래 사는 게 설아에게 처음 발각됐을 때도 인영은 어둠 속에서 헤드라이트를 켜고 컵라면을 먹다가 들켜 “한 젓가락 하실래요?”라고 묻기도 했다. 인영과 설아의 이상한 한집 살이는 공간과 체온 그리고 허기를 채우는 것에 가깝다. 초록빛 녹즙만을 들이켜던 설아의 집에 인영이 들어온 순간부터 음식 냄새가 풍기기 시작한다.
자칫 익숙하게 느껴질 수 있는 성장 스토리인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를 특별하게 빛내주는 존재는 단연 인영을 연기한 배우 이레다. 2012년 아역 으로 데뷔한 이례는 2006년생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과 이준익 감독의 영화 ‘소원’, 연상호 감독의 넷플릭스 ‘지옥’을 거치면서 연기력을 쌓았다. 인영이 한국무용을 할 때에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는 얼굴에서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단단함이 드러난다.
까칠한 감독 설아부터 눈높이에서 대화하는 약사, 인영의 곁을 지키며 툭하면 마음을 고백하는 남사친 도윤, 자유로운 인영이 부러워 시기와 질투를 품었던 나리까지. 인영은 홀로 세상에 남겨졌지만, 혼자가 아니었다. ‘괜찮아’라는 말을 건네줄 누군가가 인영의 커다란 보호막이 돼 줬다. 지난해 제74회 베를린 국제영화제 수정곰상(제너레이션 K플러스) 작품상을 수상했다.
감독: 김혜영 / 출연 : 이레, 진서연, 정수빈, 이정하, 손석구 외 / 배급 : 바이포엠스튜디오 / 개봉일: 2월26일/ 관람등급: 12세 이상 관람가 / 러닝타임: 102분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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