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에게는 본인의 이미지가 함축된 여러 개의 별칭이 붙는다지만, 유독 이민호에게는 ‘스타(STAR)’라는 말이 이질감 없이 따라붙었다. 일명 뽀글거리는 ‘소라빵 머리’가 상징인 구준표의 2009년 ‘꽃보다 남자’로 한국을 넘어 일본을, 2011년 ‘시티헌터’와 2013년 ‘상속자들’로 중국 대륙을, 2022년 애플 tv+ 오리지널 시리즈 ‘파친코’로 전 세계로 영역을 넓혔다.
이른바 ‘백마 탄 왕자님’ 이미지의 작품들은 이민호를 누구보다 빛나게 했지만, “30대가 되면서 계속 소모되는 배우가 아니라 뭔가를 줄 수 있는 배우”라는 고민에 불을 지폈다. 2020년 ‘더 킹: 영원의 군주’의 대한제국 3대 황제 이곤으로 정말 백마를 타고 등장한 뒤, 왕자의 이미지를 졸업하고 ‘파친코’의 가난이란 덫에서 빠져나와 자수성가한 한수 역으로 새로운 챕터를 열었다.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싶은 욕구가 생겼을 때 ‘파친코’를 만났다”는 이민호는 “(한수 역할은)단지 이미지 변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에너지”였다고 말한다.
스타라는 뜻 뒤에는 대중적으로 유명한 사람과 별/항성이라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근접해 보이지만 비교적 먼 거리에서 환하게 빛나는 ‘STAR’는 역설적이게도 짙은 어둠이 전제해야만 그 존재를 드러낸다. 밤이 되어야 우리 눈에 들어오는 별처럼 말이다.
이제 이민호는 그 고요한 어둠이 일상이 되는 우주 속의 무중력 상태로 몸을 맡긴다. 4일 첫 방송한 한국 최초 우주 배경 드라마 ‘별들에게 물어봐’로 돌아온 이민호는 중력이 작용하는 지구를 벗어나 무중력 상태에 속 가치가 변환하는 과정을 그린다. 자신을 규정짓는 하나의 틀을 깨고 다양한 시도를 하듯, 이민호는 지구를 벗어나 우주를 유영한다. ‘이민호에게 물어봐’~ 이민호의 반짝이는 순간들을 담은 작품 5편을 소개한다.
● 드라마 ‘꽃보다 남자’, 상류층의 고귀한 이미지를 부여하다 (2009년/ 25부작 / 다시보기 : U+모바일tv·쿠팡플레이·왓챠·웨이브)
그 시절, 모두가 열광했다. 순정만화에서 튀어나온 듯한 캐릭터들과 손발이 오글거리는 대사들, 등장할 때마다 들려오는 웅장한 BGM(배경음악)과 아직까지 회자되는 수많은 밈(meme, 인터넷에서 트렌트로 떠오른 이미지나 글)을 탄생시킨 추억의 드라마. 동명의 일본 순정만화를 원작 삼았다. 이민호를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했다. 2006년 EBS 드라마 ‘비밀의 교정’으로 데뷔한 20대 초반 이민호의 대표작이다.
대한민국 상위 1%만 다니는 사립고등학교를 배경으로 ‘서민’ 금잔디(구혜선)와 재벌가 아이 구준표(이민호)의 로맨스를 그렸다. 특히 구준표를 비롯해 학교의 ‘왕자님들’이라고 불리는 일명 ‘F4′(꽃처럼 아름다운 남자 4명)인 윤지후(김현중), 소이정(김범), 송우빈(김준) 캐릭터로도 많은 시청자의 추억에 남았다.
이민호는 상류층 사회 출신의 편협한 사고방식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벗어나 상대방의 기분을 궁금해하고, 상처 주는 말들을 뱉기보다는 유연하게 상황에 대처한다. 높게 솟은 성 안의 작은 울타리 안에서 자라온 가시 돋친 장미였던 구준표는 자신을 규정짓던 것들에서 벗어나 새로운 것들을 만난다.
● 드라마 ‘시티헌터’, 시원시원한 액션에 감탄하다(2011년 / 다시보기 : 넷플릭스·왓챠·애플tv·웨이브·U+모바일tv·티빙)
1985년부터 1991년까지 일본의 주간 소년점프가 연재한 호조 츠카사의 동명의 만화가 원작이다. 1980년대 후반 도쿄를 배경으로 탐정 의뢰를 받아 해결하는 료를 그린 만화를 드라마화하며 한국사회를 둘러싼 이슈들을 녹여냈다.
이민호는 청와대 경호처에서 일하는, 비밀에 싸인 이윤성 역을 맡았다. 최정예 북파공작 대원이었던 아버지이 복수를 위해 정체를 숨기고 청와대에 입성한 뒤 대통령의 딸을 담당하는 경호원 김나나(박민영)와 부딪힌다. 데뷔 이후 첫 액션 연기에 도전했다. 이 작품으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수백대의 폐차 위를 뛰어다니고, 협소한 계단이 있는 어두운 공간에서 빛을 등지고 몸싸움을 벌이거나, 숟가락과 생수병 등 일상적 사물과 지형지물을 이용한 액션 연기까지 그렸다. 180cm가 훌쩍 넘는 키와 길쭉길쭉한 팔은 시원시원한 이민호의 액션 연기를 보여주는 데 한몫한다.
● 드라마 ‘상속자들’, 청춘의 치기와 온전함에 대하여(2013년 / 20부작 / 다시보기 : 넷플릭스·U+모바일tv·SBS·왓챠·웨이브)
‘꽃보다 남자’로부터 약 4년 정도 시간이 지나 다시 교복을 입었다. 상류층 자제들이 다니는 제국고등학교에 차은상(박신혜)이 사회배려자 전형으로 입학한 뒤 전작 ‘꽃보다 남자’ 이후 다시 재벌가의 입을 옷고 이민호가 연기한 김탄과 벌이는 로맨스 이야기. ‘파리의 연인’·’시크릿 가든’·’태양의 후예’·’도깨비’·’미스터 선샤인’·’더 글로리’의 김은숙 작가가 대본을 썼다. 세상에 존재하는 가치있는 것들의 무게를 본인만의 저울로 재측정해 울림을 주는 김은숙 작가의 문체로 탄생한 김탄 캐릭터는 시청자에게 이질감 없이 다가섰다.
이민호는 마음 붙일 구석이 없고,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는 고등학생 김탄을 치열하게 묘사한다. ‘꽃보다 남자’의 구준표 이미지를 포개지 않고, 독립적인 캐릭터로서 김탄을 견고하게 구현했다. 사랑 앞에서 거추장스러운 수식어는 거두절미하고, 남들의 시선도 개의치 않는 김탄은 이민호가 그리고자 한 ‘청춘’의 깊이로 묵직함을 얻었다. “혹시 나 너 좋아하냐”, “그럼 지금부터 나 좋아해. 가능하면 진심으로. 난 네가 좋아졌어”, “좀 힘들지도 몰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진”이라는 얼핏 유치하게 들리는 대사 안에 18살 청춘의 치기와 진심을 뭉근하게 녹여냈다.
넘어지고 부딪혀도 다시 일어나는 청춘의 모습이 밝게 빛났다.
● 드라마 ‘푸른 바다의 전설’, 츤데레의 정석 (2016년 / 20부작 / 다시보기 : 넷플릭스·U+모바일tv·SBS·왓챠·웨이브)
지구상의 마지막 인어 심청(전지현)과 좋은 머리와 잘 생긴 얼굴, 화려한 언변을 구사하는 사기꾼 허준재(이민호)의 만남. ‘넝쿨째 굴러온 당신’·’별에서 온 그대’·’사랑의 불시착’·’눈물의 여왕’의 대본을 쓴 박지은 작가의 작품. 조선시대와 현대를 오가며 이야기를 풀어낸다. 사람을 순수하게 믿는 인어와 사람을 믿지 않는 사기꾼의 묘한 만남을 전지현과 이민호가 로맨스를 매개로 그려낸다.
이민호는 캐릭터에게 부여된 ‘사기꾼’이라는 설정답게 능청스럽고 능글맞다. 곤란한 일련의 상황에서 뱀처럼 스르륵 빠져나가거나 별다른 고민 없이 살아가는 것만 같다. 사기꾼이지만 허준재가 꼭 지키는 두 가지 수칙이 있다. 없는 사람의 돈은 떼먹지 않고, 결혼을 미끼로 사기는 치지 않는다는 것. 세상 속 편해 보이는 허준재는 어린 시절, 아빠와 이혼을 하고 집을 나간 엄마를 늘 그리워하며 찾는, 남들에게는 알리지 못한 상처가 있다.
드라마는 각자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결합하는 과정 속에서 치유하는 모습을 그린다 .이민호는 허준재가 어느 날부터 좋아하는 심청의 속마음을 듣고 귀여워 피식거리며 챙겨주는, 사랑에 빠지는 ‘츤데레’의 정석과 성숙해지는 면모로 최고 시청률 21%(닐슨 코리아)를 이끌어내며 많은 사랑을 받았다.
● 드라마 ‘파친코’ 시리즈, 삐뚤어진 집념과 일그러진 얼굴(2022년·2024년 / 각 8부작 / 다시보기 : 애플tv·티빙)
1915년부터 1989년까지 재일 한국 이민자 가족의 생존기를 그린 애플 tv+ ‘파친코’ 시리즈. 한국계 미국인 이민진 작가가 집필한 동명의 소설을 원작으로, 재일 한국 이민자의 3대의 걸친 연대기를 그린 작품이다. 이민호는 생선 중매상 출신인 한수 역을 맡아 주인공 선자(김민하)와 사랑에 빠지면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간다.
지난하고 고단한 시대의 아픔과 맞닿은 이민호의 얼굴이 자연스러운 나이의 변화처럼 한층 농익었다. 청춘의 치기 어린 사랑과 욕망으로 채웠던 작품 목록에서 벗어나 발화점은 낮지만 꺼지지 않고 타들어가는 불씨와 같은 집착과 광기의 맨얼굴을 보여줬다.
대본을 접한 이민호는 ‘꽃보다 남자’ 이후 13년 만에 오디션에 지원하며 “새로운 에너지”를 갈구했다. 곤충이 여러 차례 탈피를 하며 형태적으로 변화해가는 변태 과정을 겪듯, 이민호는 기존의 딱딱하고 안정적인 껍질을 벗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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