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기다려온 영화가 관객을 찾아온다. 우민호 감독와 배우 현빈, 그리고 ‘서울의 봄’ 제작사가 뭉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가 마침내 베일을 벗는다. ‘내부자들’과 ‘남산의 부장들’을 통해 사회성 짙은 이야기를 시대극으로 풀어내면서 한국영화 프로덕션의 발전을 이끈 감독과 제작사가 재회했고, 한류 스타에서 무게감을 더한 배우도 합류했다. 이들이 1909년을 배경으로 살을 에는 추위를 뚫고, 목숨이 위협받는 극심한 공포를 넘어 독립을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
이토 히로부미 처단에 나선 안중근과 독립군의 여정을 그린 영화 ‘하얼빈'(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이 개봉을 하루 앞둔 23일 오전 예매 관객 40만장을 넘어섰다. 작품을 향한 높은 관심이 예매율로 드러난 가운데 크리스마스 연휴를 넘어 연말, 연초로 이어지는 특수를 겨냥한다. 세상을 바라보는 감독의 날카로운 시선과 웰메이드 영화로 관객에 신뢰를 얻은 제작진을 향한 기대가 초반 관심을 이끄는 상황. 이에 더해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탄핵 정국 속에 진짜 나라를 위한 길, 미래의 세대를 위한 올바른 선택을 고민하는 사람들의 시선이 영화로 향하고 있다. 왜, 지금 모두가 ‘하얼빈’에 주목하는지 SWOT 분석으로 살폈다.
● 강점 (Strength) … 흠잡을 데 없는 완성도
‘하얼빈’은 1908년 함경북도 신아산에서 이야기가 출발한다.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현빈)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승리하지만 만국공법에 따라 전쟁 포로인 일본군을 풀어준다. 이로 인해 독립군 내부의 의견은 엇갈리고, 균열 속에 고립된 안중근은 홀로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1년이 지나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재회한 안중근과 독립군은 빼앗긴 나라를 되찾고자 일본 제국주의의 상징인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향한다.
영화는 오프닝 장면부터 관객을 압도한다. 커다란 스크린에서 당시 독립군의 처절한 모습을 확인한 순간, 생각할 틈 없이 그들의 세계로 빨려들게 만든다. “나라를 위해 헌산한 분들을 위한 작품”이라는 우민호 감독의 설명이 영화의 시작과 동시에 전율로 느껴지는 순간이다. 감독은 안중근과 관련한 자서전들을 섭렵하고 독립 투사들에 관한 자료를 빠짐없이 실피면서 작품을 구상했다. 안중근을 비롯해 함께 활동한 독립군의 나이는 대부분 20, 30대였다는 사실은 감독의 마음을 더 자극했다. “젊은 분들이 어떻게 그런 헌신을 할 수 있었을까”를 찾는 고민에서 ‘하얼빈’이 출발했다.
감독은 “편안하게 찍기”를 거부했다. 영화를 촬영하는 과정이 안중근의 여정과 닮기를 바랐다. 당시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아가는 안중근의 여정처럼 ‘하얼빈’의 여정도 몽골과 라트비아 로케이션을 통해 웅장하고 광활한 대자연에서 이뤄졌다. 당장이라도 깨질 듯 푸르른빛을 내는 꽁꽁 언 호수를 홀로 걷는 안중근의 외로운 발걸음, 모래 폭풍이 몰아치는 사막에서 앞으로 내달리는 독립군들의 절박한 질주는 그대로 관객의 가슴에 박힌다. 인물들이 엮이는 사건이나 시대상을 담는 대사가 아닌, 안중근의 여정 그 자체로 ‘하얼빈’은 100여년 전 비장미 넘치는 시간으로 관객을 안내한다.
● 약점 (Weakness) … 밀정은 누구일까, 딜레마의 이야기
‘하얼빈’은 독립군 내부에 일제의 밀정이 숨어 있다는 설정으로 긴장감을 자극한다. 한동안 사라졌다가 나타난 안중근의 믿음직한 동료 우덕순(박정민)은 어딘지 모르게 달라진 모습. 이에 이창섭(이동욱)은 우덕순이 밀정이 됐을지 모른다고 의심하지만, 안중근은 동지를 믿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맞선다. 하지만 자꾸만 안중근 일행의 작전이 세어 나가는 것처럼 보이고, 이에 누가 밀정인지를 두고 독립군 내부도 흔들리기 시작한다.
하나의 목표를 품고 달려가지만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처럼 일제가 심어둔 밀정의 존재로 독립군 내부도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박진감 넘치는 장르물로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는 ‘독립군의 활약’이 아닌, 목표를 위해 나아가는 안중근과 그 주변 인물들의 ‘갈등과 고뇌’에 더 집중한다. 역사가 스포일러인 만큼 안중근의 거사가 어떻게 성공하는지, 또한 안중근의 마지막이 어땠는지는 이미 알려진 사실. 감독은 모두가 아닌 역사를 다시 보여주는 방식에서 벗어나 30대에 불과했던 안중근이 어떤 마음으로 하얼빈까지 향하는지에 더욱 몰두한다.
이를 통해 ‘하얼빈’은 한층 깊어졌지만 반대로 딜레마에 관한 이야기가 관객을 직관적으로 자극하는 데는 한계도 분명하다. 역사극이 선사하는 쾌감이나 감동, 울분 등의 감정보다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는 점에서 과연 관객층을 얼마만큼 확장할지 미지수다. 물론 감독과 제작진이 이를 모를 리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려는 제작진과 배우들의 합심이 ‘다른 이야기’를 탄생하게 했다. 이제 관객의 평가만 남겨두고 있다.
● 기회 (Opportunity) … OTT 시리즈와 다른 영화의 격
‘하얼빈’을 촬영하면서 우민호 감독은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 플랫폼에서 공개하는 영화나 시리즈와의 차별화에 대해 계속 고민했다고 밝혔다. 한국영화의 제작과 투자 여건이 코로나 팬데믹을 거치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현실에 안주해 대중에 익숙한 이른바 ‘OTT 스타일’을 추구하기 보다, 극장에서 보는 영화의 힘을 느끼도록 고집스럽게 집중했다는 의미다. 감독은 “클래식하게 찍었다”고도 말했다. 이는 최근 영화를 극장에서 성과를 낸 ‘서울의 봄’의 김성수 감독이나 ‘파묘’의 장재현 감독 그리고 ‘베테랑2’의 류승완 감독이 줄기차게 밝힌 ‘영화 신념’과 겹친다.
실제로 ‘하얼빈’은 근래 한국영화에서 엄두를 내지 못하는 스케일과 비장미 넘치는 미장센으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특히 아이맥스 스크린 상영은 영화의 진수를 느낄 수 있는 선택. 휴대전화나 테블릿PC 혹은 TV로 영화를 보는 일이 더 익숙하지만, 영화는 극장에서 봐야 그 진짜 힘을 느낄 수 있다는 진부하지만 당연한 사실을 다시금 일깨운다.
감독의 이런 뜻에 현빈과 박정민 전여빈 조우진 등 배우도 동의했다. 특히 현빈은 극 초반을 장식하는 신아산 전투 장면에 대해 “생지옥이 펼쳐지는 장면인데 촬영 현장도 생지옥 같았다”고 돌이켰다. 감독과 배우들 그리고 모든 스태프들이 몰두한 당시 촬영 현장은 마침 진짜 눈까지 내리면서 땅이 진흙으로 변하고 총탄이 빗발치는 혼돈의 공간이 됐다. 배우들은 그대로 빠져들어 대역 없이 모든 연기를 직접 소화했다. 일련의 과정에 현빈은 “힘들었다기보다는 치열했다”고 밝혔다.
● 위기(Threat) … 퇴로 없는 빅매치
‘하얼빈’은 크리스마스 이브인 24일 개봉해 연말 극장가를 겨냥한다. 사전 예매관객 40만장 돌파를 통해 작품을 향한 뜨거운 관심을 증명하고 있지만, 초반 열기가 꾸준히 이어질지는 낙관할 수 없다. 순 제작비 265억원 투입된 대작으로 약 650만명을 동원해야 손익분기점을 넘는 만큼 웬만큼 모아서는 흥행했다고 볼 수 없다는 의미다.
현재 극장에서는 250만 관객을 동원한 ‘소방관’이 흥행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입소문을 얻어 2주 연속 박스오피스 정상을 차지한 만큼 장기 흥행을 이어갈 가능성이 크다. ‘하얼빈’이 개봉하고 일주일 뒤인 31일에는 송중기의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이 공개한다. 역시 올해 최대 기대작으로 꼽히는 작품이다. 빅시즌에 두 편의 영화가 쌍끌이 흥행을 잇는다면 더할 나위 없지만 최근 극장가에서 특히 같은 시기 개봉한 한국영화는 1편만 살아남는 분위기가 공고해지고 있다. 퇴로가 없는 빅매치가 예상된다.
다만 영화는 시대를 담는 거울이자, 사회의 목소리와 맞물려 작품의 가치가 빛을 낸다는 사실에서 ‘하얼빈’을 향한 기대는 증폭한다. 대통령 퇴진 촉구 등 탄핵 국면 속에 ‘나라 걱정’이 깊어지는 요즘, 먼저 나라의 독립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던진 독립투사들의 숭고한 정신이 2024년 12월을 살아가는 관객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남질지 주목받고 있다. 우민호 감독은 “영화를 본 관객이 위로의 힘을 얻길 바란다”며 “우리 모두 혼란의 시대를 관통하고 있지만 반드시 이겨낼 거라고 믿고 자긍심을 느꼈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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