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에 처한 누군가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내놓는 이들의 숭고한 삶이 스크린을 빨갛게 채운다. 활활 타오르는 화재 속으로 몸을 던진 소방대원들의 이야기인 ‘소방관’이 12월4일 관객을 찾아온다. 지난 2001년 3월4일 새벽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의 다세대 주택에서 벌어진 화재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낡은 주택이 무너지면서 목숨을 잃은 소방대원들의 실화를 옮긴 작품이다.
‘소방관'(제작 에스크로드픽쳐스)은 같은 날 개봉하는 송강호의 ‘1승'(감독 신연식·제작 루스이소니도스)과 겨울 극장가의 문을 연다. 올해 12월에는 이들 두 영화를 시작으로 12월11일 김윤석과 이승기의 ‘대가족'(감독 양우석·제작 게니우스), 12월25일 현빈의 ‘하얼빈'(감독 우민호·제작 하이브미디어코프), 12월31일 송중기의 ‘보고타: 마지막 기회의 땅'(감독 김성제·제작 영화사 수박)이 연이어 개봉한다. 한 달 동안 막대한 제작비를 앞세운 묵직한 한국영화 5편이 쏟아지는 상황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기대와 우려의 시선이 교차하고 있다.
가장 먼저 출사표를 던진 작품에는 그만큼 시선이 집중되기 마련. 지난 25일 언론배급 시사회를 열고 이야기를 공개한 ‘소방관’이 12월 벌어지는 5파전의 대결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을지, 그 가능성을 SWOT 분석으로 살폈다.
● 강점 (Strength) … 넘볼 수 없는 실화의 힘
영화가 다룬 홍제동 화재 사건은 23년 전 모두가 잠든 새벽 한 다세대 주택에서 일어난 방화로 벌어진 비극이다. 혼돈의 현장에 열악한 장비를 갖고 투입된 소방관 가운데 6명이 그 자리에서 순직하고, 3명이 큰 부상을 입은 대형 참사다. 화재를 진압하던 대원들이 훗날 방화범으로 밝혀진 인물이 집안에 있는 줄 알고 구조를 위해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어 더 큰 충격과 안타까움을 낳았다. 이를 계기로 소방관들의 처우와 근무 환경이 개선됐지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뒤에야 문제가 해결되는 재난의 상황은 지금도 반복된다는 점에서 ‘소방관’의 이야기는 과거를 넘어 현재로도 이어진다.
영화는 참사가 일어나기 4개월 전인 2000년 11월, 서부소방서로 발령 받은 신입 대원 철웅(주원)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5년 동안 구출자 전국 1위에 빛나는 구조반장 진섭(곽도원)이 철웅의 눈에는 영웅처럼 비치고, 각자의 위치에서 화재를 진압하는 구조대장 인기(유재명)와 구급 대원 서희(이유영), 대원 효종(오대환)과 기철(이준혁) 역시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물들이다. 철웅은 친형처럼 따르던 용태(김민재)가 화재 현장에서 세상을 떠나자, 죄책감에 시달리다가 책임을 자각하고 점차 소방관으로 성장해 간다.
‘소방관’은 철웅의 성장으로 이야기를 진행한다. 철웅의 시선은 곧 관객의 눈과 맞닿아 있다. 서툰 신입 대원에서 동료들의 희생을 겪으면서 성장하는 그의 모습은 관객을 이야기에 몰두하게 이끈다. 이 때 실화의 저력은 강력하게 작동한다. 누군가를 구하고 희생한 소방관들의 실화는 그 어떤 허구의 창작물이 결코 따라올 수 없는 묵직한 힘이 있다.
● 약점 (Weakness) … 지울 수 없는 이름, 곽도원
익히 알려진 사실이지만 없어지지 않는 진실, 영화를 상징하는 주인공 곽도원이 일으킨 음주운전 리스크이다. 이는 ‘소방관’이 관객과 만나기까지 넘어야 할 가장 높고 험한 산이다. 지난 2020년 촬영을 마친 영화는 후반작업을 거쳐 2022년 개봉을 준비하고 있었지만 돌연 연기됐다. 그해 9월 곽도원이 거주지인 제주도에서 만취 상태로 운전을 하다 적발됐기 때문이다. 당시 곽도원의 혈중알코올농도는 면허취소 수치(0.08%)를 넘었다. 음주운전의 위험성과 관련 범죄에 대한 사회적인 공분이 치솟는 상황에서 곽도원의 만취 운전이 드러나면서 ‘소방관’도 위기를 맞았다. 당장 개봉 계획이 철회됐고, 개봉까지 2년이 더 걸렸다.
영화에서 곽도원의 캐릭터가 역할상 영웅처럼 그려지는 점도 걸림돌이다. 물론 개봉 이후 관객의 평가를 받아야 하지만, 공개 전 이뤄진 시사회에서는 곽도원의 음주운전 사실로 인해 캐릭터와 이야기에 온전히 몰입하기가 어렵다는 반응이 나왔다. 그가 연기한 진섭은 화재 현장에 두려움 없이 뛰어드는 인물. 동료 대원들을 이끄는 베테랑으로 신입 철웅의 눈에는 흡사 영웅처럼 보인다. 곽도원의 실제 처지와 극중 상황에 극명하게 갈리는 대목이다.
진섭은 작품을 통틀어 가장 중요한 역할인 만큼 제작진은 곽도원의 출연 분량을 줄일 수 없었다고 했다. 곽경택 감독은 제작보고회와 시사회 자리에서 주연 배우의 책임을 다하지 않은 곽도원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면서도 영화의 흐름상 분량을 편집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제 평가는 관객의 몫으로 남았다.
● 기회 (Opportunity) … 배급사 교체
사실 ‘소방관’이 12월 대전에 합류한 배경에는 최근 작품의 배급사가 바뀐 상황이 결정적이다. 영화의 초기 투자와 배급을 맡았던 에이스메이커무비웍스가 곽도원의 음주운전 스캔들 이후 줄곧 공개 시기와 방식을 확정하지 못하다가 작품을 다른 배급사인 바이포엠스튜디오로 넘기면서 12월4일 개봉이 확정됐다.
바이포엠스튜디오는 최근 한국영화 투자에 활발히 나서고 있는 신규 투자 배급사다. 지난 2022년 배급해 누적관객 120만명을 동원한 일본영화 ‘오늘 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를 시작으로 지난해 ‘여름날 우리’, 올해 ‘남은 인생 10년’ 등 중국과 일본 로맨스 영화의 재개봉 흐름을 주도하고 있기도 하다. 공포영화 ‘늘봄가든’까지 더해 주로 1020세대 관객을 타깃으로 SNS에서 입소문을 형성하는 영화들의 배급에 주력하다가 이번 ‘소방관’을 통해 극장가 빅시즌인 12월에 본격 출격한다.
영화계에서는 바이포엠스튜디오가 ‘소방관’이 반드시 풀어야 할 과제인 ‘곽도원 리스크’를 어떻게 넘어설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소재나 장르, 메시지, 감독의 역랑까지 관객이 영화를 선택하는 기준은 다양하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꼽히는 ‘주연 배우’의 측면에서 마주한 허들이 만만치 않다. 배급사의 교체가 작품을 개봉하는 기회가 됐지만, 높은 허들을 넘어야 하는 만큼 위기가 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 위기(Threat) … 소방관의 고충, 의미있지만
곽경택 감독은 소방관들의 사투를 비교적 담담한 시선으로 그린다. 과하게 감정을 강조하거나 화재 현장의 혼돈을 영화적인 재미로 활용하지 않으려는 신중한 연출이 돋보인다. 이를 위해 감독은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화재 현장을 표현하는 과정에서도 컴퓨터그래픽의 도움을 많이 받지 않았다. 극적인 묘사보다 사실적으로 보이고자 하는 의도였다.
이런 시도 아래 영화는 소방관들의 열약한 처우와 남도를 고충을 전하는 데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할애한다. 참사가 일어난 2001년 당시 소방관들이 얼마나 어려운 환경에서 생과 사의 고비를 오갔는지에 주목한다. 예산 문제로 방화복이 아닌 방수복을 입고 불길에 뛰어들거나, 화상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는 작업용 면장갑을 끼고 사투를 벌인다. 불법 주차된 차량들 탓에 분초를 다투는 화재 현장에 진입할 수 없어 무거운 장비를 들고 내달리는 모습에서는 소방관이 지닌 사명감이 전해지기도 한다.
다만 근무환경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소방관의 직업이 얼마나 특별한지를 강조하다보니 자칫 ‘의미’가 ‘재미’를 가릴 수 있다는 우려도 제기된다. 실화 소재 영화의 강점이 선명하지만, 한계도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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