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네 명 연출자의 개성과 스타일을 엿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이명세, 장항준, 노덕, 김종관 감독이 1927년 연재된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단편 소설 ‘살인자들’을 각자의 시선으로 해석한 ‘더 킬러스’라는 신선한 도전의 결과물을 내놓는다.
‘살인자들’은 한 식당에서 타깃을 기다리는 킬러들의 이야기다. 인물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지 직접 서술하지 않고 행동과 대화를 통해 상상력을 자극하는 간결하고 절제된 표현으로 헤밍웨이의 문학적 특징을 잘 담아낸 작품으로 손꼽힌다. 현대미술 작가 에드워드 호퍼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1942년)의 영감이 됐다는 건 유명한 사실이다. 이 소설이 100년 뒤 4명의 한국 감독들에 의해 4편의 영화로 새롭게 탄생한다.
‘더 킬러스’는 ‘살인자들’이 지닌 상상의 세계와 영화적 가능성에 매료된 네 명의 감독이 각기 다른 시선으로 해석한 4편을 엮은 옴니버스 형식의 앤솔로지(일정한 주제로 펼치는 연작) 영화다. 김종관 감독의 ‘변신’을 시작으로 노덕 감독의 ‘업자들’, 장항준 감독의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 이명세 감독의 ‘무성영화’로 이어진다. 극장 버전은 이들 4편으로 구성됐지만 향후 VOD 및 OTT 플랫폼에서는 윤유경 감독의 ‘언 땅에 사과나무 심기’와 조성환 감독의 ‘인져리 타임’을 더해 총 6편의 확장판으로 공개될 예정이다.
● 네 명 감독들의 심은경 활용법
해석의 여지가 다양한 원작인 만큼, 이를 옮긴 스크린에서 드러나는 감독들의 색채도 그만큼 다채롭다. 감독들은 제약을 두지 않고 자유로운 이해와 판단으로 자신만의 영화를 완성했다. 대신 킬러라는 설정과 심은경, ‘밤을 지새우는 사람들’을 모티프로 활용한 장면 등을 통해 작품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며 하나의 프로젝트라는 단서를 남긴다. 심은경은 네 편 중 세 편에서 크게 활약한다.
김종관 감독의 ‘변신’은 등에 칼이 꽂힌 채 의문의 바에서 눈을 뜬 한 남자(연우진)가 비밀스럽고 미스터리한 바텐더(심은경)가 준 음료를 마시고 변신하면서 벌어지는 내용이다. 남자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충격을 받고, 바텐더는 이를 흥미롭게 관찰한다. 으스스하고 몽환적인 분위기가 비현실적인 세계를 이끈다.
노덕 감독의 ‘업자들’은 재치가 넘친다. 하청의 하청의 하청을 거쳐 3억원짜리의 의뢰를 단돈 3백만원에 받게 된 어리바리 살인 청부업자 3인방이 엉뚱한 타깃을 납치하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블랙코미디 장르로, 청부살인을 하청한다는 내용을 통해 현실을 꿰뚫으면서도 그 허술함이 종종 웃음을 안긴다. 심은경이 3인방에게 납치된 엉뚱한 타깃으로 생과 사를 오가는 열연을 보여준다.
1979년 밤, 매혹적인 주인(오연아)이 운영하는 한적한 선술집이 배경인 ‘모두가 그를 기다린다’는 장항준 감독이 연출했다. 왼쪽 어깨에 수선화 문신이 있다는 작은 단서만으로 살인마를 기다리는 남자들의 모습을 담는다. 베일에 싸인 무자비한 살인마의 실체를 좇는 과정서 배우들이 수위 높은 액션을 펼쳐 눈을 떼기 어렵다. 4편 가운데 심은경을 가장 적게 활용한 작품이기도 하다.
이명세 감독의 ‘무성영화’는 다소 난해하다. 범법자, 도시 난민, 추방자들이 모여 사는 지하세계 ‘디아스포차 시티’에 신원 미상의 타깃을 찾아온 두 킬러가 등장하며 전개되는 일종의 소동극이다. 킬러와 음식점 주인 간의 대치를 그리는데, ‘형사 듀얼리스트(Duelist·2005년) ‘M'(2007년) 등 내용보다 주로 이미지, 스타일리시한 연출을 선보인 이명세 감독의 색깔이 짙게 녹아있다. 표현 방식이 지나치게 이색적이고 예술적인 느낌이 강해 호불호가 갈릴 것으로 보인다.
‘더 킬러스’는 실험정신이 가득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반갑다. 원작에서 얻은 영감을 바탕으로 네 명의 연출자들은 자신들의 창작 세계를 마음껏 뽐낸다. 네 명의 감독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심은경 활용법도 관전 포인트다. 2019년 일본영화 ‘신문기자’의 성공 이후 ‘블루 아워’ 등 줄곧 일본 작품에 집중했던 심은경이 오랜만에 국내 관객들과 만나 다채로운 매력을 드러낸다.
앤솔로지 영화를 표방하는 ‘더 킬러스’는 최근 ‘밤낚시’ 등 단편영화의 극장 개봉과 44분 분량의 공포영화 ‘4분44초’ 등 장르와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실험이 이뤄지는 극장가에서 새로운 도전으로 주목받는다. 여러 명의 감독이 한편의 영화에 모여 하나의 주제 아래 각자의 작품을 완성하는 색다른 시도이기도 하다. 각각의 작품에 담긴 감독의 색깔이 뚜렷하고, 한 명의 배우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 도전으로도 눈길을 끈다.
장항준 감독은 “최근 한국영화의 장르가 고정돼 있다는 말을 많이 하는데, 그런 면에서 ‘더 킬러스’는 근래 하지 않았던 새롭고 용기 있는 시도의 작품”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관객 입장에서 다채로운 색감의 영화인 만큼 눈과 귀와 머리가 즐거웠다. 손익분기점을 넘어서 앞으로도 용기 있는 기획들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희망했다.
감독 : 김종관, 노덕, 장항준, 이명세 / 출연 : 심은경, 연우진, 홍사빈, 지우, 이반석, 오연아, 장현성, 곽민규, 이재균, 고창석, 김금순 외 / 장르 : 드라마, 액션, 스릴러, 시네마 앤솔로지 / 공개일 : 10월23일 / 관람등급: 청소년 관람불가 / 러닝타임 : 119분 /
[맥스무비 리뷰는 ‘포테이토 지수’로 이뤄집니다. 나만 보기 아까워 추천하고 싶은 작품은 반짝반짝 잘 익은 BEST potato(100~80%), 탁월하지 않아도 무난한 작품은 NORMAL potato(79~50%), 아쉬운 작품은 WORST potato(49~1%)로 나눠 공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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