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존 인물과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닙니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책을 접할 때 흔히 등장하는 ‘실제 사건이나 인물과는 무관한 창작물입니다’라는 문구와 정확히 대비되는 ‘도발’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연출하고 배우 케이트 블란쳇이 주연한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디스클레이머'(Disclaimer)가 도발적인 선언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제작진의 명성에 걸맞는 완성도를 갖추고 짜릿한 긴장감도 선사한다. 극본과 연출, 연기는 물론 촬영과 미술 등 세트까지 빈틈 없이 꽉 채웠다.
올해 하반기 애플TV+ 기대작으로 주목받은 ‘디스클레이머’가 지난 11일 베일을 벗었다. 전체 7부작 가운데 단 2편이 공개됐을 뿐이지만, 주인공 캐서린(케이트 블란쳇)을 둘러싼 비밀스러운 이야기에 매료된 시청자를 중심으로 호평이 이어지고 있다. 앞으로 매주 금요일마다 1편씩 공개할 새로운 이야기를 향해서도 관심이 집중된다.
‘디스클레이머’는 당초 국내서 ‘누군가는 알고 있다’라는 제목으로 공개될 예정이었다. 하지만 영문 제목이 작품의 주제와 이야기를 직관적으로 알린다는 판단 아래 영제를 그대로 사용해 국내 시청자와 만나고 있다. 제작진의 이 같은 선택의 이유는 1회를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캐서린이 무명의 작가로부터 받은 소설책 앞장에 ‘주의사항'(Disclaimer)으로 적힌 문구가 단번에 시선을 끌면서 시청자를 빨아들이고 있어서다. ‘실존 인물과의 유사성은 우연이 아니다’는 안내 문구다.
● 베일에 가려진 비밀, 팽팽한 심리전
유명한 저널리스트 캐서린은 누군가의 악행을 폭로하면서 인정받는 인물. 재력을 갖추고 사회적으로도 안정된 남편과 부유한 가정을 꾸리고 있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캐서린 앞에 발신인을 알 수 없는 한권의 소설이 소포로 도착한다. 무심코 첫 장을 열고, 밤을 새워 책을 전부 읽은 캐서린은 화장실로 달려가 먹은 걸 모두 토해낸다. 책에 담긴 이야기가 자신의 과거를 향해 있다.
‘디스클레이머’는 숨기고 싶은 과거가 폭로될 위기에 처한 캐서린이 낯선 소설을 접한 뒤 맞는 파국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는 캐서린과 그 가족, 그리고 청년 조나단(루이스 패트리지)과 그 부모의 모습을 교차해 보이면서 이들 사이에 숨은 비밀에 서서히 접근한다. 처음엔 전혀 관계가 없어 보이는 인물과 상황이지만, 흡사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는 것처럼 캐서린과 조나단의 이야기가 맞물리면서 팽팽한 심리전으로 확장된다.
캐서린의 과거가 호기심을 자극하고, 무너지는 인물들의 심리가 시선을 압도하는 ‘디스클레이머’는 근래 애플TV+ 오리지널 시리즈 가운데 단연코 탁월한 완성도를 갖췄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과 케이트 블란쳇의 만남 또한 기대에 적중한다. 도전을 거듭한 다양한 작품으로 전 세계 팬들을 사로잡은 감독과 배우는 스스로 이름값을 증명하고 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이번 ‘디스클레이머’로 드라마 시리즈 연출 처음 도전했다. 지난 2019년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로마’와 2014년 영화 ‘그래비티’로 번이나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은 탁월한 감각과 시선은 드라마에서도 변함이 없다. 거대한 비밀을 감춘 캐서린의 불안한 심리를 따르면서 그 주변 인물들의 비밀스러운 관계를 파고들고, 전혀 다른 시간대를 동시에 배치해 시청자의 추리력까지 한껏 자극한다. 현재의 캐서린은 짙은 어둠 속에, 과거의 캐서린은 찬란한 태양 아래 놓아 대비의 간극도 강조한다.
케이트 블란쳇은 2014년 ‘블루 재스민’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고 2018년 ‘캐롤’로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명배우. 굳이 이런 수상 경력을 언급하지 않아도 연기력에 관해 구구절절 설명이 필요없는 배우이지만 이번 ‘디스클레이머’를 통해 또 한번 시청자를 놀라게 한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비밀을 품고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생을 살지만, 감추려는 과거가 강제로 폭로되면서 맞는 불안한 감정과 파괴의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클로즈업으로 비추는 케이트 블란쳇의 얼굴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드라마를 보는 재미는 충분하다.
아카데미 수상으로 실력을 인정받은 제작진은 더 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과 영화 ‘칠드런 오브 맨’을 함께 하고, ‘버드맨’으로 2015년 아카데미 촬영상을 수상한 엠마누엘 루베즈키 감독이 촬영을 맡아 드라마에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더한다. 캐서린의 현재와 과거가 극명하게 갈리는 촬영 방식을 통해 인물의 변화는 물론 비밀스러운 사건에 대한 궁금증도 키운다. 2022년 영화 ‘007 노 타임 투 다이’로 아카데미 주제가상을 받은 피니즈 오코넬이 맡은 음악 역시 극 전반에 서스펜스를 강조한다.
캐서린을 파국으로 이끄는 스티븐 역의 케빈 클라인은 어느덫 70대 후반이 됐지만, 나이가 무색한 단단한 얼굴로 작품의 또 다른 축을 맡는다. 소중한 아들 조나단을 잃은 슬픔으로 무력감에 빠진 아버지가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해야 할 일을 무섭게 실현하는 모습으로 긴장을 불어넣는다.
‘디스클레이머’는 앞으로 5편의 이야기를 남겨 두고 있다. 국내 팬들의 관심은 배우 정호연의 출연에 향해 있기도 하다. ‘오징어 게임’으로 스타덤에 오른 정호연은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러브콜을 받고 곧바로 ‘디스클레이머’ 촬영을 소화했다. 위기에 빠진 캐서린의 조력자인 지수 역할의 정호연은 초반 1, 2회에서는 짧게 등장해 아쉬움을 남겼지만 앞으로 무명의 작가를 찾는 캐서린의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만큼 활약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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