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김지운 감독 “비탄과 절망 자기혐오에 빠지면서도, 왜 영화를 할까요?”
“관객들은 새로운 걸 원한다.”
영화 ‘거미집'(제작 앤솔로지스튜디오)에서 주인공 김열 감독은 이렇게 말한다. 이 말은 영화를 연출한 김지운 감독의 ‘영화관’이기도 하다. 코미디, 공포, 누아르, 한국형 서부극, 시대극 등 매번 새로운 장르를 선보여온 김지운 감독이 이번엔 블랙코미디로 돌아왔다.
유신정권인 197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거미집’은 다 찍은 영화 ‘거미집’의 결말만 바꾸면 걸작이 될 거라 믿는 영화감독 김열(송강호)이 검열을 피해 바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는 배우와 제작자 사이에서 촬영을 밀어붙이는 한바탕 소동극이다.
“다시 찍으면 걸작이 된다”고 믿고 재촬영을 감행하는 김열 감독은 스승인 신 감독(정우성)의 경지에 다가가기 위해 고뇌하고, 좌절하면서도 자신의 영화적 야심인 ‘플랑 세캉스'(롱테이크)를 밀어붙인다. 김열 감독에게서 1970년대 몇몇 감독의 모습이 보이지만, 사실 김열 감독 안에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인물은 다름 아닌 김지운 감독이다.
● “영화 현장만 가면 오르락내리락…”
‘거미집’ 개봉을 앞두고 21일 서울 종로구의 한 카페에서 만난 김지운 감독은 “현실 김지운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머감각을 유지하자’가 신조인데, 영화 현장만 가면 오르락내리락하고 비탄과 절망과 자기혐오에 빠지고 어쩔 때는 내 역량에 감탄하기도 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도대체 영화가 뭐길래 평정심을 유지하던 사람이 영화 현장만 가면 비탄과 자학과 환희를 느끼는 걸까요? 그래서 영화를 하는 걸까요? 박찬욱 감독도 그러더라고요. 자신이 하루는 천재 같기도 하고, 하루는 쓰레기 같기도 하다고요. 저 역시도 마찬가지죠. 김열 감독에는 어느 정도가 아니라 상당히 제 자신이 들어가 있어요.”
김열 감독이 ‘거미집’ 남주인공인 강호세(오정세)에게 “나만 좋으려고 이러는 거냐”라며 그에게 진심이 담긴 연기를 요구한다. 이는 김지운 감독이 실제 배우들에게 했던 말이다.
불이 난 세트장의 불을 끄는 와중에 “잘 찍혔지?”라며 묻는 장면 또한 그렇다. 김지운 감독은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당시 폭발 장면을 찍은 뒤 정신없어 하는 촬영감독에게 이 같은 말을 건넸다.
● “‘거미집’을 통해 식었던 영화에 대한 꿈과 사랑 회복되길”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겪으며 많은 산업들이 위기에 직면했지만, 영화산업은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 OTT, 유튜브 등 수많은 매체들이 영화의 자리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이 위기론은 현재 진행형이다. 김지운 감독 또한 팬데믹을 거치면서 영화가 무엇인지 스스로 재정의하는 시간을 보냈다.
“영화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가장 근접한 형태로 묘사하는, 현대성을 규정하는 강력한 매체입니다. 이게 덧없이 사라지는 걸까? 정말 끝이야? 이런 상념에 빠졌을 때 스티븐 스필버그의 ‘파벨만스'(2023년) 그리고 ‘바빌론'(2023년) 등 영화를 얘기하는 작품이 많아졌더라고요. 제가 했던 질문들을 세계 영화인들도 하고 있었던 거죠.”
때문에 김지운 감독은 ‘거미집’을 통해 “약간 식었던, 희미해진 영화에 대한 꿈과 사랑이 회복됐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아직 개봉 전이지만, 영화인들 사이에서는 이 바람이 어느 정도 통한 것 같다.
“VIP 시사회 후에 뒤풀이를 했는데, 누구인지 밝힐 수는 없지만 한 감독이 영화는 봤는데 뒤풀이에는 안 왔어요. ‘왜 안 와?’라고 물으니까 ‘지금 시나리오를 쓰러 가야 될 거 같다’고 말하더라고요. 물론 VIP 시사회를 하면 대부분 좋은 말들을 해주지만, 진짜인지 아닌지 느낌으로 알 수 있거든요. 좋은 기운을 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게 관객들에게 이어지면 제일 좋겠죠. 하하.”
‘거미집’은 개봉을 앞두고 한차례 고비가 찾아오기도 했다.
앞서 고 김기영 감독의 유족 측은 송강호가 연기한 김열 감독이 고인을 모티브로 하면서도 부정적으로 묘사해 인격과 초상권을 침해했다며 상영금지가처분 신청을 냈다. 제작진은 유족과 합의해 영화는 예정대로 개봉한다. 영화 속 김열 감독은 특정인이 아닌 1970년대 당시 활동한 여러 영화감독들의 모습을 총합해 묘사했다는 부분에 유족도 동의했다.
이날 인터뷰에서 김지운 감독은 김기영 감독과의 남다른 인연을 처음 고백했다.
“과거 김기영 감독님의 조감독 자리를 소개받아 뵌 적이 있었어요. 그때 감독님이 어떤 영화의 엔딩 장면을 해석하라고 했는데, 저의 해석에 80점을 주셨어요. 유족들을 만나서 그때의 얘기를 하니까 점수를 잘 받은 거라고 하더라고요. 제 진심이 잘 전달됐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거미집’은 그 시대(1970년대)의 전체적인 느낌을 담고 싶었지, 김기영 감독님을 특정해서 만든 영화는 아닙니다.”
● “송강호씨가 현장에 있으면 제작자가 한명 더 있는 느낌”
기필코, 걸작을 만들고 싶은 김열 감독을 연기한 송강호는 ‘거미집’을 통해 데뷔 후 처음으로 영화감독 역할을 연기했다. 그것도 김지운 감독을 꼭 닮은 감독을 말이다. 김 감독이 자신의 ‘페르소나’로 송강호를 내세운 이유는 분명했다.
“자기 일에서 정상에 오르고 그 정상을 유지하는 건 엄청난 자기 인내와 단련을 요구하는 일이에요. 기회나 재능이 있으면 정상에 도달할 수 있지만, 그걸 유지한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거든요. 그 과정에서 사람도 훌륭해질 수밖에 없는데, 겸손해야 되기 때문이죠. 송강호씨가 현장에 있으면 제작자가 한 명 더 있는 느낌이에요. 자기 것만 보는 게 아니라 큰 그림을 보는 배우죠. 훌륭한 조력자, 지원군, 파트너로 생각하고 있어요.”
김지운 감독은 “자연인 김지운이 늙는 건 상관없지만, 영화인 김지운은 늙고 싶지 않다”고 고백했다. 그가 매번 새로운 장르에 도전하고 할리우드에 진출한 이유이기도 하다.
“새로운 걸 할 때마다 영화적 에너지와 생기가 생긴다”는 그는 “과거 좋은 영화들을 보면서 스스로도 좋아진 부분이 분명히 있기에 여전히 영화를 하고 있다”고 했다.
“좋은 영화를 보면 ‘저렇게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어떻게 살아야지?’라는 질문을 던지게 돼요. 현재 나의 모습이 10년 뒤를 결정한다고 생각해요. 지금 쉬고 노는 것보다 영화 한 편을 더 보고, 책 한 권을 더 읽으려고 하는 이유입니다. 그 시간이 저를 단련시키고, 10년 뒤를 결정하기 때문이죠. 제 영화를 통해서 저 같은 사람이 나온다면 그것이야말로 제가 영화를 하는 이유이자 목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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