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빙’ 특집] 한국형 히어로 설계자, ‘웹툰 시조새’ 강풀의 세계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나누는 따뜻한 사랑의 감정 그리고 애틋한 가족애. 세상으로부터 상처입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이 서로 힘을 모으거나, 때론 함께 불의에 맞서는 이야기. 20여년간 웹툰 작업에 몰두해온 강풀 작가가 줄곧 집중해온 작품의 세계다.
주변으로 눈을 돌리면 현실 속 어딘가에서 진짜 살아 숨쉴 것만 같은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보는 이들의 감정을 자극하고 때론 감동을 자아내는 강풀 작가의 힘이 ‘무빙'(연출 박인제 박윤서)을 통해 다시금 저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렇게 형성된 공감대의 힘은 국내에만 머물지 않는다. 전 세계로 확장하는 ‘무빙’의 인기에는 작품의 시작인 ‘무빙 설계자’ 강풀이 있다.
●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이야기
강풀 작가는 2015년 웹툰 ‘무빙’ 연재를 시작했다. 이후 드라마 제작이 결정되자 제작사에 작품의 방향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다가 ‘직접 써보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받았다.
처음엔 망설였다고 했다. 고민 끝에 ‘일단 써볼테니, 읽어보고 판단해달라’는 조건(?)을 달고 극본 집필에 들어갔다. 2003년 웹툰 ‘순정만화’로 데뷔해 경력 20년이 훌쩍 넘었지만 드라마 극본 집필은 처음이었다.
강풀 작가는 ‘무빙’ 공개 전 이뤄진 크리에이터 토크에서 “착한 사람들이 이기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최근 몇년간 영화는 물론 드라마에서도 장르물이 대세로 인정받고, 권선징악의 메시지 역시 ‘철 지난 이야기’로 치부되는 환경에서 ‘착한 사람들의 승리’는 어느덧 잊힌 정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착한 사람들이 고난을 이겨내고 결국은 승리하는 이야기에 집중한 강풀 작가의 선택은 결과적으로 통했다.
‘각자도생’이 마치 미덕인양 통하는 각박한 세상에서 인간애와 사랑, 가족애라는 본연의 가치에 주력한 이야기가 뜻밖에 ‘판타지’처럼 느껴진다는 반응은 ‘무빙’에는 오히려 강력한 이점으로 작용했다.
처음 12부~16부작으로 제작하려던 ‘무빙’이 20부작으로 확대된 배경에도 강풀 작가의 제안이 있었다.
크게 3개 파트로 나눠지는 원작의 이야기를 드라마로 옮겨오기 위해서는 자녀 세대와 부모의 서사, 그리고 이들이 힘을 합치는 연합의 서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해서다. 등장인물이 많고, 이들이 시대를 넘나들면서 각자 방대한 서사를 풀어야 하기에 20부작 구성이 필요하다고도 판단했다.
‘무빙’은 전체 20부작 가운데 현재 13회까지 공개된 상황. 전반부에서는 김봉석(이정하)과 장희수(고윤정)를 중심으로 초능력을 물려받은 자녀들이 겪는 방황과 이를 뛰어넘는 하이틴 로맨스에 집중했고, 중반부는 부모 세대인 김두식(조인성) 이미현(한효주) 장주원(류승룡)의 과거를 펼쳤다. 후반부에서는 자녀와 부모 세대가 힘을 합해 악의 세력에 맞서는 대결이 펼쳐진다.
시간의 흐름을 비틀고, 매회 주력해 보여주는 등장인물들을 바꾸고, 이들이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극을 진행하면서 서서히 풀어가는 설계는 ‘무빙’이 시청자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결정적인 원동력이 되고 있다. 만약 시간의 순서대로 이야기를 진행하거나 매회 여러 명의 이야기가 뒤섞였다면 지금같은 집중도를 유지하기는 어려웠다. 강풀 작가의 ‘설계의 마술’이 ‘무빙’을 보다 특별한 작품으로 만들고 있다.
캐스팅도 빼놓을 수 없다.
‘무빙’은 출연하는 배우들의 수가 다른 드라마와 비교해 월등히 많지만 저마다 적역을 맡은 듯 배역에 녹아든다. 캐릭터와 그 역할을 맡은 배우들이 절묘한 어울림 덕분에 ‘캐스팅 그 자체가 신의 한수’라는 평가도 받는다. 여기에도 강풀 작가의 역할은 있다.
특히 극 초반 초능력을 숨기고 살아가는 아이들을 위협하며 서서히 다가서는 프랭크 역할은 잔혹한 킬러로 보이지만 일면 유년기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강제로 미국으로 끌려가 훈련받고 자란 아픈 과거가 있다. 이방인의 느낌을 짙게 풍기는 이 역할을 구상하면서 강풀 작가는 가장 먼저 배우 류승범을 떠올렸고 프랑스에 머물던 배우에게 직접 연락을 취해 대본을 건네고 캐스팅을 성사시켰다.
원작에 없던 번개맨 전계도(차태현) 캐릭터를 드라마에 새롭게 넣어, 초능력을 물려받은 자녀 세대의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든 설계도 강풀 작가의 아이디어였다.
● 웹툰 원작의 영화화… 강풀 작가가 열었다
영화계와 방송가에서 웹툰을 원작 삼아 영상 콘텐츠로 확장하는 시도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건 강풀 작가의 작품이 불씨를 당겼다. 2006년 고소영이 주연한 공포영화 ‘아파트’부터 2008년 차태현과 하지원 주연의 영화 ‘바보’, 같은해 유지태와 이연희가 출연한 ‘순정만화’의 원작 역시 강풀 작가의 동명 웹툰이었다.
2011년 노년의 사랑을 그려 흥행에도 성공한 ‘그대를 사랑합니다’, 마동석의 핵주먹이 연쇄살인범을 찾아내는 이야기 ‘이웃사람’의 원작도 강풀 작가의 웹툰이다.
그동안 줄곧 영화로 제작됐던 강풀 작가의 웹툰이 드라마로 만들어진 건 ‘무빙’이 처음. 하지만 ‘무빙’은 강풀 작가의 이전 작품들과 맥이 닿아 있기도 하다.
초능력이란 설정에서는 ‘타이밍’과 연결돼 있지만 그보다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사람의 이야기란 점에서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자들의 유족이 전두환 암살 작전을 벌이는 이야기인 ’26년’를 떠올리게 한다. 냉전을 지나 남북한 대립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세력에 휘말려 이용당하거나 희생된 이들의 이야기라는 점에서 두 작품은 강풀 작가의 세계 안에서 고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 중심에는 가족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있다.
강풀 작가는 이번 ‘무빙’을 통해 한국형 히어로물임을 강조한다. 슈퍼 파워를 보유하고 지구를 지키는 할리우드 히어로와의 차이, 그건 다름 아닌 가족을 지키는 사람이 곧 영웅이라고 생각하는 작가의 가치관에서 출발한다.
강풀 작가는 크리에이터 토크에서 “등장인물들이 세상을 구하겠다는 계기보다 나의 동료와 친구, 연인까지 소중한 사람을 위해 싸운다”며 “나의 사람을 위해 싸우는 영웅들의 이야기로 ‘무빙’은 시작됐다”고 밝혔다. 그가 말하고 싶은 진짜 영웅은, 판타지의 세계가 아닌 우리 주변에 있는 이들이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