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미키17’ 개봉을 앞두고 지난 20일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봉준호 감독은 전 세계 영화계의 최대 화두인 AI(Artificial Intelligence·인공지능) 시대를 대비해 “매일 밤 AI가 절대 쓸 수 없는 시나리오를 어떻게 쓸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봉준호 감독은 “이세돌 전 바둑기사가 AI 알파고를 굴복시킨 ‘신의 한 수’가 있다. 그런 수가 세 페이지마다 한 번씩 등장하는 시나리오를 쓰자는 마음가짐”이라며 AI에 대해 “무시무시하다. 영화 업계에서도 논쟁과 부딪히는 부분들이 많이 있고, 다들 예민한 상태”라고 말했다.
봉 감독이 언급한 영화 업계의 ‘예민함’은 최근 브레이디 코베이 감독이 연출한 ‘브루탈리스트’에 AI 기술이 활용됐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촉발된 갈등에서 더욱 선명하게 확인된다. ‘브루탈리스트’는 지난 6일(한국시간) 열린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영화 드라마 부문 작품상을 비롯해 감독상, 남우주연상을 받으며 올해 아카데미(오스카) 시상식의 청신호를 밝힌 작품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에 정착하게 된 헝가리 출신 유대인 건축가 라즐로 토스(에이드리언 브로디)의 삶을 그리는 영화로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라즐로가 마주한 ‘아메리칸드림’을 철학적이면서도 현실적으로 담아 호평받았다.
● ‘브루탈리스트’는 왜 논쟁을 촉발했나
오스카 레이스의 선두에 선 ‘브루탈리스트’와 관련된 논쟁은 ‘AI 활용’으로 촉발됐다. 영화의 편집자인 다비드 얀초가 한 인터뷰에서 주인공 에이드리언 브로디와 펄리시티 존스가 헝가리어 대사를 자연스럽게 구사하도록 돕기 위해 AI 도구를 활용했다고 밝힌 내용이 단초가 됐다. 얀초는 “헝가리 현지인조차도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하고 싶었다”는 이유로 AI를 사용했다고 밝혔다. 또한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생성형 AI를 이용해 주인공의 스타일로 건축 도면과 건물들을 제작했다고도 설명했다.
AI의 활용은 일부에 불과하지만 세밀한 예술 스타일로 극찬을 받은 ‘브루탈리스트’의 제작에 AI 기술이 적용된 사실이 드러나면서 논란은 거세졌다. 오스카 유력 후보로 꼽히는 영화의 AI 사용에 대해 부정적인 여론이 형성됐고, 소셜 미디어에서는 AI 사용이 오스카 후보 자격 요건을 위반했다며 경쟁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강경한 목소리까지 나오고 있다.
논란이 확산하자 얀초는 “AI가 제공할 수 있는 도구들에 대해 개방적인 논의를 해야 한다”면서 “영화에서 AI를 사용한 것은 이전에도 해왔던 일이다. 단지 프로세스를 더 빠르게 만든 것뿐이다. 예산과 시간 때문에 촬영하지 못했던 세부적인 부분을 AI로 구현했을 뿐”이라고 해명했다. 실제 할리우드 기존 영화들과 비교해 적은 예산인 1000만 달러(144억원)로 제작된 ‘브루탈리스트’는 AI 기술을 통해 후반 작업의 속도를 높일 수 있었다.
브레이디 코벳 감독도 거들었다. 그는 “에이드리언과 펠리시티의 연기는 완전히 그들 자신의 것”이라며 AI는 헝가리어 대사 중 특정 모음과 발음을 정밀하게 수정하는 데만 초점을 맞췄다고 선을 그었다. 헝가리어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뜻이다. 또한 건축 디자인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졌고, AI는 일부 효과에만 적용했다고 부연했다.
● ‘브루탈리스트’ 논란이 과장? “불안감 반영한 상황”
창작의 전반에서 AI가 인간의 노동을 대체할 수 있다는 심각한 우려로 배우와 작가들의 파업까지 일어난 할리우드이지만, 영화 제작에서 AI는 점점 더 폭넓게 활용되는 추세다.
지난해 8월 개봉한 ‘에이리언: 로물루스’에서는 2020년 세상을 떠난 배우 이언 홈이 AI를 통해 영화 속에 부활했다. ‘포레스트 검프’의 로버트 저메키스 감독과 톰 행크스가 다시 뭉친 영화 ‘히어’에서는 톰 행크스의 모습을 디에이징(실제보다 젊어 보이게 하는 특수효과) 기술로 표현했다. 몰라보게 젊어진 톰 행크스의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인디아나 존스: 운명의 다이얼’에서도 같은 기술을 이용해 해리슨 포드를 한층 젊게 묘사했다. 디즈니+ 오리지널 시리즈 ‘만달로리안’에서는 AI를 활용해 마크 해밀의 목소리를 젊게 만들었다. 제작 시간을 단축하고 비용 절감 측면에서도 AI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브루탈리스트’와 관련된 논쟁이 과열됐다는 지적도 존재한다. 그렇지만 미국 연예매체 버라이어티는 “‘브루탈리스트’를 둘러싼 논의가 과장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이는 창작 작업을 자동화된 프로세스에 맡기는 것에 대한 더 큰 불안감이 반영된 사항“이라고 짚었다. 여기에 이 작품이 오스카 유력 후보로 거론되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불씨가 더욱 타올랐다는 지적이다.
AI의 활용도가 높아질수록 할리우드에서는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높다. 미국 CNN은 런던 메트로폴리탄 대학교의 ‘디지털 영화 및 TV 제작’ 수석 강사인 루이스 히튼의 말을 빌려 ‘브루탈리스트’에 대한 갑론을박은 미래 일자리의 문제와 얽혀 있다고 분석했다. 그는 “AI 사용은 점점 더 일반화되고 공개적으로 인정받을 가능성이 높다”면서도 “AI가 재능 있는 창작자들을 대신하는 값싼 대체재이자 일자리를 빼앗는 존재로 여겨지기도 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공포가 2023년 미국 배우·방송인 노동조합(SAG-AFTRA, 배우조합)과 미국작가조합(WGA) 파업에 반영됐다고도 설명했다.
배우조합은 배우의 목소리, 외모, 연기를 보호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둔다. AI가 이를 대체할 경우 배우의 노동력이 저평가되거나 아에 사라질 수 있다는 위기 의식도 있다. 이는 ‘브루탈리스트’의 제작진이 배우들의 연기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AI 기술을 사용했다고 설명하고 있지만 에이드리언 브로디의 발음에 AI를 사용한 것 자체가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 한국영화에서도 점점 커지는 AI 활용
한국영화 제작에도 AI는 적극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아직 실험적인 성격이 강하지만 지난달 배우 나문희 주연의 AI 영화 ‘나야, 문희’가 정식 개봉해 관객들과 만났다. 나문희가 주연이지만, 나문희는 없는 영화다. 100% AI 기술을 활용해 제작됐는데, 배우의 디지털 지식 재산권(IP)을 정식으로 확보했기에 가능했다. 지난달 CJ ENM은 AI 기술로 제작한 단편영화 ‘M호텔’을 선보였다. CJ ENM 내 AI사업추진팀 소속 4명의 전문가가 이야기의 개발부터 제작까지 한달 만에 완성한 작품이다.
상업 영화에서도 AI를 접목하는 시도가 늘어나고 있다. 지난 8일 개봉해 관객들과 만나고 있는 박지현 주연의 ‘동화지만 청불입니다’에서는 성동일의 젊은 시절을 디에이징 기술로 구현했다. 지난달 4일 개봉한 이현우, 문정희 주연의 공포영화 ‘원정빌라’ 역시 본편 편집과 음악 제작, 오프닝과 엔딩 시퀀스 등 다양한 과정에서 AI 기술을 도입했다. 다만 곳곳에서 AI 활용은 늘어나고 있지만 할리우드처럼 AI 활용과 관련한 다양한 담론과 논의는 부족한 상황이다.
전찬일 영화평론가는 “옳고 그름을 떠나서 서구는 개인주의와 합리주의에서 출발하는 나라이기 때문에 개인의 권리 침해라는 점에서 봤을 때 AI 활용과 관련해서 다양한 논의가 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라며 “AI는 저작권이나 개인 권리 측면에서 봤을 때 윤리적으로 문제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할리우드에서 이와 관련된 논쟁이 첨예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이어 “한국이나 아시아 같은 경우는 이런 면에서 다소 둔감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넘어가는 측면도 없지 않다”고 밝혔다.
이어 할리우드 내에서 “개인의 권리라는 측면에서 봤을 때 관련된 갈등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면서도 “큰 비용이나 기술을 들이지 않고 제작을 할 수 있기 때문에 AI를 결국에는 활용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전 평론가는 한국 AI 영화 시장에 대해 “결국 상업화하는 방향으로 가겠지만 현재로서는 시기상조이고 욕심으로 보인다. 관객들이 돈을 주는 상업화까지 몇 년이 걸릴지 모른다. 서둘러서 가기보다는 AI 영화 그 자체로 작품성을 인정받고, 이슈가 되고 그러면서 사람들의 폭넓은 관심을 얻고 난 다음에 상업화의 방향으로 틀어도 늦지 않다”면서 “AI는 확실히 주류 영화 산업의 화법을 바꿔놓을 것이다. 지금은 10분~20분 정도의 단편만 나오고 있지만, 앞으로 60분 이상의 장편도 충분히 나올 수 있다. 그렇지만 산업 자체가 성숙하지 않았으니 서두르는 것은 경계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