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정한 앞머리와 어깨선을 넘는 긴 머리카락, 표정 변화 없는 창백한 얼굴, 한없이 냉소적인 말투까지.
지난 15일 종영한 MBC 금토드라마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극본 한아영·연출 송연화)는 또 한 명의 배우를 탄생시켰다. 채원빈(23)이다. 그는 도무지 속내를 알아챌 수 없는 고등학생 장하빈 역을 맡아 심리스릴러라는 장르적 외형에 걸맞게 차분하고 담담하게 드라마를 이끌어갔다는 호평을 받고 있다. 첫 지상파 방송의 드라마 주연임에도 채원빈은 극중 상대역인 한석규와 힘의 균형 속에서 어느 한쪽으로 쏠리지 않고 자신만의 무게를 유지했다.
드라마는 프로파일러인 아버지 장태수(한석규)가 수사 중인 살인사건에서 딸 장하빈(채원빈)의 흔적을 발견하며 의심하고 또 무너져내려가는 이야기를 그렸다. 서로 의지해야 할 아버지와 딸은 어둠 속에 숨어 말을 삼키고 진실을 감춘다. 장태수는 어린 아들의 추락사 현장에서 딸 장하빈이 피투성이가 된 상태로 서 있던 어린 시절 모습을 떠올리며 의심을 피워낸다. 가족은, 그렇게 붕괴됐다.
지난 10월11일 첫 방영해 시청자 입소문을 탄 드라마는 무엇이 진실인지 예측할 수 없는 이야기를 명과 암의 경계와 그림자 등을 활용해 그려낸 송연화 감독의 세밀한 연출력으로 호평받았다. 그 속에서 눈부신 활약을 펼친 채원빈을 만났다.
● 캐릭터 장하빈을 구성하는 내부의 요소들
2001년생인 채원빈은 “기쁨은 기쁨대로, 슬픔은 슬픔대로” 표현하지만,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장하빈을 만나 감정을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인물로 그려내려 노력했다고 밝혔다.
보통의 사람들과는 다른 장하빈은 자신을 유일하게 믿어줬던 어머니 윤지수(오연수)의 갑작스러운 죽음 뒤에 숨겨진 비밀을 찾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이에 ‘장하빈이 사실은 사이코패스 혹은 소시오패스가 아니냐’는 의견이 덧대지지만, 채원빈은 캐릭터를 자신만의 방식으로 묘사하면서 “어떤 것도 정의 내리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덕분에 일정한 카테고리로 인물을 규정짓지 않고, 상상하게 만드는 묘미를 시청자에게 줬다.
“‘사이코패스냐. 소시오패스냐’라는 말에 대해서도 ‘맞다, 아니다’로 정의하고 싶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물론 남들과 다른 것 맞아요. 반응들이 평범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그게 주가 되지는 말자고 생각했어요. 감독님께 ‘장하빈의 성격적인 요인은 선천적이냐, 후천적이냐’라고 여쭤본 적이 있어요. ‘선천적인 것이 없지는 않겠지’라고 하시더라고요. ‘이 친구한테는 바로잡아질 기회가 없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린 나이부터 아버지의 의심을 받고 자라온 인물이잖아요.”
장하빈을 따라다니는 ‘평범하지 않다’는 심리적 테두리는 계속해서 감정 표현을 하지 않고 어둠 속으로 숨게 만든다. 채원빈은 그런 장하빈을 연기하면서 “속이 답답하고 응어리가 맺히기도 했다. 막연히 이유를 생각해 봤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느낀 채로 표출하지 못해서 계속 남았다“면서 “많이 울었다. 원래 나는 조금의 감정만 느껴져도 잘 표현하는 사람인데, 하빈이로 살면서 그렇게 하지 못했다.”고 털어놨다.
감정 표현에 둔감했던 장하빈이 폭발하는 순간은 어머니가 자신을 의심했다는 것을 알면서다. 고등학교 친구이던 이수현의 죽음에 딸인 장하빈이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고 오해한 윤지수는 시체를 땅에 파묻다 오히려 협박을 받고 이후 비극을 맞는다. 장태수의 사건들에서 장하빈의 흔적이 발견하는 이유도 딸이 어머니의 죽음 뒤에 있는 진실을 알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빈이에게 엄마는 유일한 편이에요. 감독님이랑 처음 이야기를 할 때도, 하빈이의 인간관계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눴어요. 엄마랑 그 외의 사람들이에요. 엄마는 그 어디에도 끼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죠. 아무래도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시나리오를 읽고 연기하니 그런 부분들이 자연스럽게 녹아들었던 것 같아요.”
● 외부의 든든한 테두리, 한석규·송연화 감독
현실에서는 드라마와 달리 아버지 장태수를 연기한 한석규가 채원빈의 편이 되어 주었다. 채원빈은 연기를 의심하지 않고 계속 나아갈 수 있게 한석규가 힘을 실어줬다고 말했다. 그는 한석규에 대해 “평생 잊을 수 없는 선물 같은 기억들”이라고 말했다. 한석규는 자신의 둘째 딸과 채원빈의 나이가 같다면서 딸처럼 느껴진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원래 촬영이 끝날 때까지 반응을 찾아보지 않았어요. 좋은 말이건, 안 좋은 말이건 흔들릴 것 같았어요. 한석규 선배님께서 마음이 쓰이셨는지 조언을 해주셨어요. ‘첫 주연작이라서 많은 반응들이 있을 텐데, 혹여나 너한테 상처 주는 말들이 있더라도 그 순간 진심을 다해서 연기했다면 그 말들은 너한테 중요한 것이 아니다’라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그렇게 와닿지 않았는데, 시간이 지나니 어떤 마음으로 해주신지 알겠어서 너무 감동이었죠.”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는 표면적으로 범인이 누구인지를 찾는 범죄 스릴러이기도 하지만, 신뢰가 무너지고 멀어졌던 부녀가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과정을 담은 ‘가족드라마’이기도 하다. 집 안에서 기다란 테이블의 끝과 끝에 앉아서 서먹한 대화를 몇 마디 주고받던 아버지와 딸이 마지막 화에 도달해서야 서로를 끌어안는 장면이 이를 말해준다.
채원빈은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을 꼽으라면 마지막 화 경찰서 신”이라고 언급하며 “두 사람이 처음으로 진심을 담은 대화를 나눈 순간들이 기억에 남는다”고 떠올렸다.
또 채원빈과 한석규의 부녀 관계에 몰입력을 높여주며 배우들과 소통한 송연화 감독도 채원빈에게는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채원빈은 “중반부터 감독님만 보면 눈물이 났다. 그렇게 치열하실 수가 없더라. 지쳐서 그 자리에 벌러덩 눕고 싶을 때에도 감독님을 보면 ‘더 열심히 해야지’라는 생각을 했다. 우리 모두를 이끌어주신 선장님 같은 분이다“라고 존경심을 드러냈다.
● 장하빈을 만나, 채원빈이 들여다본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정의 내리는 것에 집중하지 말고, 시간이 많으니까 천천히 여유를 가지면서 찾아가 봤으면 좋겠다고 말하고 싶어요.”
채원빈은 오랜 시간 함께 한 ‘이토록 친밀한 배신자’의 장하빈을 떠나보내면서 이렇게 말했다. 작품을 찍으면서 “당연한 것들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됐다”는 채원빈은 “하빈이를 연기하면서 ‘나는 어떤 사람이지’에 대해 생각해 본 것 같다. 나는 무언가를 정의 내리는 사람은 아닌 것 같다. 온전히 열어둔다. 그래서 (하빈이를 보며) 더 마음이 아프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라고 덧붙였다.
“학창시절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됐어요. 지금 보면, 너무 별 것도 아닌 것들로 고민한 것 같아요. 그 시절의 내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는 거지만. 사실 하빈이가 가진 것들은 너무 무겁다 보니까, ‘이게 과연 감당할 수 있는 일인지’ 궁금해서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했죠. 그때의 저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푼 것 같아요.”
그러면서 “한석규 선배님 같은 어른이 되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10년, 20년, 30년 후를 막연하게 그려보기만 했지, 어떻게 살면 좋을지 답을 못 내렸었어요. 하지만 한석규 선배님을 옆에서 보면서 느꼈어요. 어떤 상황이 있더라도 늘 따뜻함을 잃지 않으시고 시야가 굉장히 넓으신 것 같아요. 그게 굉장히 힘든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점들이 존경스럽죠. 나는 (한석규)선배님 같은 어른이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본 것 같아요.(웃음)”
이제 그는 오는 12월 방영하는 KBS 2TV 드라마 ‘수상한 그녀’로 다시 시청자를 만난다. 2014년 개봉한 황동혁 감독의 영화 ‘수상한 그녀’를 리메이크하는 작품으로, 채원빈은 김해숙의 손녀 역으로 출연한다. 장하빈과는 다른 밝고 자신의 감정에 솔직한 사랑스러운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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