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한차례 개봉해 관객들을 만났던 작품들이 ‘재개봉’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영화관에서 상영하는 횟수가 늘고 있다. 무엇보다 이러한 재개봉 영화들은 ‘알짜배기 흥행’을 이끌며 극장가의 새로운 트렌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5일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 따르면 지난 1일부터 3일까지 주말 사흘간 재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날씨의 아이’가 3만7350명을 모아 박스오피스 5위를 기록했다. 2019년 10월 개봉한 영화는 5주년을 기념해 지난달 30일 재개봉해 관객을 만나고 있다. 지난달 9일 재개봉한 ‘노트북’ 역시 4일까지 누적 관객 16만5939명을 동원했다. 20년 전 처음 공개된 영화이지만 시간을 뛰어넘어 관객을 다시 사로잡고 있다.
극장가에서 재개봉이 주목받고 있다. 애니메이션부터 멜로, 음악 영화까지 다양한 장르의 과거 흥행작들이 다시 개봉한다. 추석 연휴를 앞둔 지난 9월13일 개봉한 ‘베테랑2’ 이후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 모으는 뚜렷한 흥행작이 없는 데다, ‘하얼빈’ 등 대작들이 집중된 12월을 앞두고 10월과 11월에 재개봉 영화들이 극장을 채우고 있다. 화제작이 부재한 상황에서 ‘명작’으로 인지도를 쌓은 작품들을 극장에서 다시 보는 기회도 제공하고 있다.
● “극장에서 봐야 가치있는 영화에 투자”
최근 재개봉의 성공 사례로 꼽히는 작품은 ‘노트북’이다. 재개봉만으로 16만명 이상을 동원한 영화는 10월25일부터 10월27일까지 할리우드 대작 ‘베놈: 더 라스트 댄스’를 제치고 좌석판매율(17.5%)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관객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 드러나는 기록이다. 영화는 여전히 할리우드의 스타로 활동 중인 라이언 고슬링과 레이첼 맥아담스의 풋풋한 시절을 볼 수 있는 애절한 사랑 이야기다.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밝고 유쾌한 앨리(레이첼 맥아담스)와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시골 청년 노아(라이언 고슬링)의 진실한 사랑을 담았다. 멜로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는 작품으로 지난 2016년과 2020년에도 재개봉했지만, 보고 또 보는 관객의 호응 속에 열기를 이어가고 있다.
신카이 마코토 감독의 ‘날씨의 아이’가 재개봉 첫 주에 박스오피스 5위에 오른 기록도 눈에 띈다. ‘너의 이름은.’과 ‘스즈메의 문단속’의 감독이 연출한 ‘날씨의 아이’는 도시에 온 가출 소년이 하늘을 맑게 하는 소녀를 만나 겪는 이야기다. 2019년 개봉 당시 66만여명이 관람한 가운데 재개봉 6일째인 4일까지 누적 6만2308명을 동원하면서 새롭게 개봉한 공포영화 ‘4분44초’, ‘롱그레스’ 등을 제치고 5위를 유지하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가 발표한 2024년 9월 한국 영화산업 결산 보고서에서도 재개봉 영화의 성과는 확인된다. 보고서에 따르면 외국영화 재개봉작인 ‘소년시절의 너'(2019년)와 ‘비긴 어게인'(2014년)이 9월 독립·예술영화 부문 흥행 1, 2위를 차지했다.
영화진흥위원회는 “중국의 청춘 로맨스 영화 ‘소년시절의 너’가 8월28일 재개봉해 9월 한 달간 매출액 14억5342만원(14만9122명)으로 9월 독립·예술영화 흥행 1위에 올랐다. ‘비긴 어게인’은 9월18일 재개봉해 14억3539만원의 매출액(15만2602명)을 기록했다”고 밝혔다. 재개봉작에 집중된 관심 탓에 신작인 ‘한국이 싫어서'(2만5510명)와 ‘장손'(2만130명), ‘그녀에게'(1만9460명)는 9월 독립·예술영화 부문에서 각각 3~5위에 머물렀다.
재개봉 영화의 열기는 올해 4월 ‘남은 인생 10년’으로도 증명됐다. 지난해 5월 처음 개봉할 당시 13만명을 모은 영화는 1년 만의 재개봉으로 무려 43만명을 추가 동원했다. 첫 개봉보다 재개봉에서 3배 넘는 관객을 더 모은 셈이다. 이를 통해 누적 56만명을 기록하는 이례적인 성과를 거뒀다. ‘노트북’과 마찬가지로 청춘 남녀의 절절하고 애틋한 로맨스를 그린 작품이라는 점에서 눈에 띈다. ‘남은 인생 10년’은 배우 고마츠 나나와 사카구치 켄타로가 주연해 이뤄질 수 없는 사랑을 그렸다.
이현경 영화평론가는 “스크린에서만 봐야 하는 가치 있는 작품에 투자하는 방식으로 소비 트렌드가 변화하는 분위기와 맞닿아 있다”며 “OTT 플랫폼으로 언제든지 원하는 콘텐츠를 관람하는 환경에서 확실한 재미나 감동이 보장되는 작품을 선택하는 분위기도 확고해졌다”고 분석했다.
● 멜로 영화 선호도…재개봉 영화들에 집중
재개봉작의 증가는 영화시장의 변화와도 맞닿는다. 기존 한국영화의 연중 최대 성수기는 여름인 7, 8월과 연말연초가 맞물린 12월, 1월로 꼽혔다. 하지만 팬데믹 이후 성수기를 겨냥한 한국영화 대작들이 흥행에 실패하는 사례가 늘면서 공고했던 ‘개봉 시기’의 중요성은 힘을 잃고 있다. 올해 흥행 1, 2위에 오른 ‘파묘’와 ‘범죄도시4’가 그동안 극장 비수기로 통한 2월과 4월 개봉해 나란히 1000만 성과를 낸 사실도 이를 뒷받침한다.
이에 따라 배급사들과 극장은 ‘검증된 작품’을 관객에게 다시 선보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실제로 올해 재개봉한 영화들은 유수의 영화제에서 수상했거나 오래 전부터 관객들 사이에서 재미있다고 입소문이 난 작품들이다. 또한 ‘노트북’이나 ‘남은 인생 10년’처럼 한국영화에서 한동안 시도하지 안은 로맨스, 멜로 장르를 향한 관객의 요구를 대체하는 작품들도 눈에 띈다.
올해 재개봉 영화 가운데 가장 돋보인 ‘남은 인생 10년’과 ‘노트북’의 흥행은 1020세대 여성 관객이 주도한다. 멜로 장르를 선호하는 관객층이기도 하다. 실제로 5일 기준 CGV 예매 분포에 빠르면 ‘노트북’을 선택한 연령별 관객은 20대(36.6%)와 10대(26.1%)가 가장 높게 나타났다. 성별 분포에서는 여성(62.9%)이 남성(37.1%)을 월등히 앞질렀다. ‘남은 인생 10년’도 비슷한 양상이다. 20대(35.%)와 10대(21.9%)의 비중이 가장 높았고, 성별 분포 역시 여성(58.7%)이 남성(41.3%) 보다 높게 나타났다.
이 같은 흐름 속에 당분간 영화들의 재개봉 러시는 계속될 예정이다.
6일에는 피아니스트 임윤찬의 다큐멘터리 영화 ‘크레센도’가 1년 만에 재개봉한다. 임윤찬이 지난달 세계적인 클래식 음악 시상식인 영국의 그라모폰 클래식 뮤직 어워드에서 피아노 부문을 수상한 성과를 기념하는 취지다. ‘크레센도’는 2022년 전 세계 음악계의 유망주가 모인 반 클라이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최연소 우승을 차지한 임윤찬의 도전 기록을 담았다.
영화는 지난해 11월6일 개봉 당시 6만7000여명의 관객을 동원했고, 올해 1월 확장판인 ‘크레센도 반 클라이번 콩쿠르 실황’으로 다시 7000여명을 모았다. 이른바 ‘임윤찬 팬덤’의 집결을 통해 본편과 확장판으로 이미 7만4000여명의 관객을 동원한 ‘크레센도’가 이번 재개봉으로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둘지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지난해 11월 개봉해 53만명을 동원한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괴물’도 7일 재개봉한다. 감독의 연출작 가운데 국내서 가장 높은 흥행을 기록한 ‘괴물’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아들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의 변화를 감지한 싱글맘 사오리(안도 사쿠라)가 담임교사인 호리(나가야마 에이타), 아들의 친구인 요리(히이라기 히나타)를 통해 그동안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는 이야기다.
2016년 개봉한 케이트 블란쳇과 루니 마라 주연의 ‘캐롤’은 오는 20일, 2006년 개봉한 김래원 주연의 ‘해바라기’는 이달 중 재개봉한다.
8년 만에 스크린에서 다시 보는 ‘캐롤’은 2015년 열린 제68회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루니 마라)을 비롯해 전 세계 영화제 77관왕을 휩쓴 작품이다. 195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나이와 상황이 다른 두 여인의 사랑을 그렸다. 올해 개봉 18주년을 맞아 관객을 다시 찾는 ‘해바라기’는 고교 중퇴 후 맨주먹으로 거리의 양아치들을 쓸어버린 오태식(김래원)이 시간이 지나 가석방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꼭 그렇게 다 가져가야만 속이 후련했냐” “오태식이 돌아왔구나” 등 수많은 명대사로 지금도 회자된다. 이번 재개봉에서는 화질을 개선한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공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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